국내에서 항일운동을 전개하다가 잡혀 대구형무소에서 복역한 최양옥(崔養玉)이 만주로 망명하여, 김정련(金正連)·이용화(李容華)·안창남(安昌南) 등과 비밀항일무장단체인 대한독립공명단을 조직하고 단장이 되었다.
이듬해 이 단체는 북만주에 독립군 비행사를 양성할 목적으로 비행학교 설립을 계획하고, 그 소요자금을 국내에서 모금하는 한편, 공명단의 국내지단을 설치하기 위하여 국내공작활동을 전개하였다.
1929년는 최양옥이 김정련·이선구(李善九) 등과 국내에 잠입하여 서울 근교에 은신하면서 거사대상을 탐지하였다. 4월 18일 이들은 서울에서 춘천으로 향하는 일본 우편수송차를 기습할 것을 결정하고 마치고개에서 공격하였다.
이들은 차에 실었던 우편낭에서 현금을 탈취한 뒤 조선인의 우편물만 남기고 모두 소각한 다음 강원도 방면으로 은신하였다. 거사가 진행되는 동안 자신들의 행적이 발각되지 않게 하기 위하여 그 지점을 통과하는 모든 차량을 정차시키고, 승객들을 모두 하차시켜 산속에 감금한 뒤 도주하였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일본경찰은 경기도·황해도·강원도·충청도의 경찰병력과 일본군의 응원병력을 얻어 공명단원을 추격하였다. 양주(楊州)의 천마산(天摩山)에 은신하고 있던 공명단원은 마침내 일본경찰에 발각되어 1주일 동안 격전을 벌인 끝에 탄환이 떨어져 끝내 잡히고 말았다.
최양옥은 징역 10년, 김정련은 징역 9년, 이선구는 징역 6년의 선고를 각각 받고, 서대문형무소에서 복역하던 중 이선구는 옥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