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산전투 ()

고대사
사건
927년(고려 태조 10)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후백제견훤(甄萱)과 태조 왕건(王建)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
이칭
이칭
공산동수전투(公山桐藪戰鬪)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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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927년(고려 태조 10) 지금의 대구광역시 동구 팔공산(八公山) 일대에서 후백제견훤(甄萱)과 태조 왕건(王建) 사이에 벌어졌던 큰 전투.
내용

당시 여러 호족들 중에서 양대세력으로 성장한 후백제의 견훤과 태조는 외교상 화친을 맺고 있었으나 양자의 대결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그런데 견훤은 그즈음 신라를 강력하게 공격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927년 9월근암성(近盦城 또는 近巖城: 지금의 경상북도 문경군)을 빼앗고, 이어 고울부(高鬱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천)를 공취한 뒤 경주로 군사를 밀고 갔다. 이에 신라의 경애왕이 고려태조에게 구원을 청하자, 태조는 곧 몸소 군사를 이끌고 출전하였다.

그러나 태조의 원군이 이르기도 전에 후백제군은 경주를 함락하였다. 후백제군은 영천에서 신령-화산-호당-도동-임포-아화-건천-모량을 거쳐 경주로 진입하였다. 경주에 들어간 견훤은 군사를 풀어 크게 약탈하고, 경애왕을 스스로 목숨을 끊게 한 뒤 왕족 김부(金傅: 경순왕)를 세워 왕위에 올리니 이가 곧 경순왕이다. 견훤은 경순왕의 아우 효렴과 재상 영경(英景) 등을 포로로 하고 각종 보물과 기술자 등을 약탈하여 귀환길에 올랐다.

이 때 태조는 신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경애왕의 죽음을 조문하고 정기(精騎) 5,000명을 거느리고 내려와 대구 동남쪽에 위치한 공산 동수(桐藪: 동화사)에 대기하고 있다가 경주에서 철수하는 후백제와 전투를 벌이게 되었다. 이 공산전투에서 고려군은 크게 패하여 장군 김락(金樂)과 신숭겸(申崇謙) 등이 죽고, 많은 군사가 전사하였으며 태조도 간신히 몸을 피하였다.

이 전투를 시발로 두 나라의 대결은 매우 첨예화되었다. 따라서, 종래 표면상 유지된 양국간의 평화는 깨어지고 무력충돌이 심화되어, 후삼국사(後三國史) 전체를 통하여 보면 통일전쟁이 가속되는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의의와 평가

견훤은 공산전투를 대승리로 장식하여 경상도 지역을 석권하는 위세를 떨쳤으며, 성주와 칠곡으로 진출하여 고려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려고 하였다. 낙동강을 건너 대목군(大木郡: 칠곡군 약목면)을 빼앗고 곡식을 불태웠으며, 벽진군(碧珍郡: 경북 성주)을 침략하였다.

견훤은 공산전투의 승리와 몇몇의 국지전에서 추가로 승리한 후 그해 12월에 왕건에게 국서를 보내 ‘활을 평양의 다락 위에 걸고 내가 총애하는 말에게 패강(대동강)의 물을 먹이겠다’는 자신감을 보였다.

928년견훤은 대야성이 위치한 합천읍과 초계지역을 장악한 뒤 강주(康州: 진주)까지 차지하여 고려의 남해안 지역 해상활동을 차단할 수 있게 되었다. 견훤은 둘째 아들 양검(良劍)을 강주도독으로 삼아 지방통치를 강화하였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려사(高麗史)』
「공산전투의 재검토」(류영철,『향토문화』9·10집, 1995)
「견훤정권의 지방지배와 호족연합정권」(신호철, 『후백제 견훤정권연구』, 일조각, 19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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