충청남도 공주는 백제시대의 웅진(熊津)으로 서기 475년부터 538년까지 64년간 백제의 도읍지였다. 천도와 함께 백제의 도읍지로서 각종 시설이 갖추어지고 주민생활이 영위되면서 왕실을 비롯한 귀족과 평민들의 무덤이 있다. 왕릉으로 송산리고분군, 지배층의 무덤으로 웅진동고분군을 비롯하여 신기동, 금학동 등지에 고분군이 자리한다. 이들은 웅진도읍기 백제 묘제를 대표하는 것이며, 이밖에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부터 이 지역에 자리하여 세력을 형성하였던 지방세력의 무덤인 수촌리고분군도 있다.
공주는 백제의 두 번째 도읍지이다. 서기 475년 고구려의 공격으로 한성이 함락되고 개로왕이 전사하는 등 한성 중심의 지배세력이 붕괴되었으며 뒤이어 왕위에 오른 문주왕은 같은 해 10월에 웅진으로 천도함으로써 웅진시대가 개막되었다. 이후 백제는 웅진인 지금의 충청남도 공주에 64년간 도읍하였고 그에 따라 왕궁 등의 국가시설을 마련하였으며, 더불어 왕과 귀족 등의 무덤도 남겼다. 한성백제가 천도하기 전의 웅진에 대한 정황은 구체적이지 않다. 그러나 공주 수촌리고분군의 존재는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공주의 인근 지역에 커다란 지방세력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백제시대의 공주 고분군은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에 조성한 금강 북쪽의 수촌리고분군 등의 존재와 천도 후에 조성한 금강 남쪽의 송산리고분군, 웅진동고분군, 금학동고분군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하기 이전의 공주 고분군으로 대표적 사례는 수촌리고분군을 포함하여 산의리, 송원리, 하봉리고분군 등이 있다. 수촌리고분군은 2002년에 발굴조사된 것으로 움무덤〔土壙墓〕과 돌덧널무덤〔石槨墓〕, 돌방무덤〔石室墳〕6기로 구성되었다. 또한 2000년도에 조사된 이인면 산의리고분군은 돌덧널무덤으로 구성된 고분군이고, 2008년에 조사된 장기면 송원리고분군은 돌방무덤 외에 돌덧널무덤 및 주구 움무덤〔周溝土壙墓〕이 있다. 그리고 1990년대에 조사된 장기면 하봉리고분군은 3세기말 무렵의 주구 움무덤인데, 이들 웅진천도 이전에 조성된 고분군은 금강의 북쪽 혹은 도읍지 외곽에 분포되어 있다.
반면에 웅진천도 후에 조성된 백제 고분들은 도읍지 일원에 자리잡고 있다. 그중에서 1927년에 조사된 송산리고분군은 1971년 무령왕릉의 발견으로 백제의 대표적 왕릉군으로 분류되었으며, 1979년에 발굴조사된 웅진동고분군은 웅진도읍기 백제 귀족들의 무덤으로 파악된다. 이후에 발굴조사된 공주 보통골고분군, 금학동고분군, 신기동고분군도 같은 성격의 것들이다. 이외에 우성면 단지리에는 굴무덤〔橫穴墓〕라는 특수한 무덤도 존재한다.
공주 고분군에 사용된 백제의 고분 유형은 웅진천도 이전의 무덤들로 주구 움무덤, 널·덧널움무덤〔棺槨土壙墓〕, 돌덧널무덤과 초기형의 돌방무덤 등을 꼽을 수 있다. 주구 움무덤은 하봉리고분군이나 송원리고분군에 있다. 이들은 지반을 굴광하여 묘광을 조성하여 널·덧널〔棺槨〕을 설치하는데 외변에 봉분 조성과 관련된 주구(周溝)를 남기는 특색이 있으며, 부장품은 금·은 세공품보다는 구슬과 철제공구 그리고 각종 토기류를 많이 남긴다. 반면에 널·덧널움무덤은 취리산유적, 수촌리유적의 1·2호 움무덤이 대표적 사례인데, 묘광에 널 혹은 덧널을 안치하지만 주구는 없는 것이 특징이다. 널·덧널움무덤의 부장품은 토기나 철제 공구 외에 금제 귀걸이나 무기도 부장되는데, 특히 수촌리 1호 움무덤에서는 백제의 토기나 철제무기와 공구 이외에 금동제 관모, 금동제 신발과 중국제의 자기류도 출토되었다. 돌덧널무덤은 송산리고분군과 산의리고분군 등지에 남아 있으며, 묘광을 파고 그 안에 석축하여 묘실을 만들었지만 출입시설이 없는 무덤이다. 이 묘제는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등장 이전에 사용된 것으로 철제의 공구나 무기, 각종의 장신구와 토기가 부장된다. 그리고 웅진천도 이전의 공주 고분군에서 확인되는 돌방무덤은 초기형으로 출입시설을 갖춘 무덤방을 만들었지만 정형화되지 않은 것이다. 대표적 사례는 수촌리고분군의 4·5호 돌방무덤을 꼽을 수 있으며, 부장품은 금동관모와 금동제 신발, 그리고 중국제 자기를 비롯하여 가장 고급스런 물품을 풍부하게 부장하였다.
백제의 웅진천도 후에 조성된 공주 고분군 내의 무덤은 굴식 돌방무덤이 단일 유형을 이룬다. 웅진도읍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벽돌무덤〔塼築墓〕이 일부 남아 있고, 이외에 특수한 형태로서 굴무덤도 존재한다. 굴식 돌방무덤은 송산리고분군을 비롯하여 웅진동고분군, 금학동고분군, 신기동고분군 등 웅진천도 후에 조성된 고분군에서 대부분 확인된다. 무덤의 형태는 남향의 산경사에 묘광을 파고 남쪽으로 출입시설을 갖추면서 석축하여 하나의 무덤방을 만드는데, 천장은 원형으로 조성한 궁륭식(穹窿式), 앞 뒤의 벽면을 좁혀 구성한 아치식, 양쪽의 긴 벽을 좁혀 만든 터널식으로 구분되나 궁륭식이 다수를 차지한다. 또한 중국 남조사회(南朝社會)에서 널리 사용되던 벽돌무덤 묘제로서 송산리고분군 내의 무령왕릉과 제6호 벽돌무덤이 있다. 벽돌무덤을 만드는 방법은 돌방무덤과 같지만 재료를 연꽃무늬 혹은 동전무늬가 있는 벽돌을 사용하였다든가 벽체에 벽감(壁龕)이나 창문을 시설하는 등의 차이가 있다. 이외에 굴무덤은 산 경사면에 횡으로 굴을 파고 굴 안을 무덤 내부로 사용하는 것인데 백제 묘제로서는 공주 단지리고분군이 대표적이며, 웅진동고분군과 안영리고분군에서도 소수가 확인되었다.
공주 고분군은 백제의 웅진천도 이전에 주구 움무덤, 돌덧널무덤과 초기형 돌방무덤처럼 백제 지역의 고유한 전통이 간직된 무덤이 사용되었다. 반면에 백제가 웅진으로 천도한 이후에는 굴식 돌방무덤이 포괄적으로 사용되었다. 이는 공주가 천도를 기점으로 지방사회에서 도읍지로 전환된 것과 관련하여 이 지역에서 사용된 고분 묘제의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급격한 변화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아울러 웅진에 도읍했던 시기에 만든 고분군 내 돌방무덤의 무덤 내용도 초기는 한성지역에서 정립된 궁륭식이나 아치식이 그대로 사용되었다. 그러다가 중국 묘제인 벽돌무덤의 축조방식, 즉 천장을 터널형으로 구성하는 기법이 유입되면서 그 구조와 속성이 백제 돌방무덤에 전용되었다. 이후 터널식 천장이 창출됨으로써 백제적 색채를 띠는 ‘평천정 돌방무덤’으로 발전하는 기회를 마련하였다. 다만 공주 단지리고분군에서 발견되는 굴무덤은 그 기원과 전개상을 구체적으로 검토할 수 없는데, 비슷한 유형의 무덤이 일본지역에도 있어 상호 비교가 되기도 한다.
공주 고분군은 백제가 웅진에 도읍하기 이전의 고분군과 도읍한 이후 만든 고분군이 금강 혹은 도읍권역을 경계로 구분된 채 존재한다. 더불어 고분군 내 개별 무덤의 구조·형식도 천도 이전과 천도 이후의 것이 중앙과 지방, 그리고 시기 차가 반영된 형태로 존재하여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경에 역동적으로 나타나는 백제 고분문화의 변천상을 대변한다. 특히 웅진도읍기에 중국에서 유입된 벽돌무덤은 왕릉으로 조성되었음과 아울러 이후 백제 돌방무덤의 형식 변화를 가져와 백제인의 선진문화 수용과 소화의 한 단면을 선명하게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