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7월 김형옥(金衡玉) 등 전라남도 내 유지 50여 명이 사립인 광주보통학교 설립기성회를 결성하여, 1920년 5월에 광주군청 객사인 광산관(光山館)에서 광주고등보통학교로 설립하였다.
김형옥이 임시 교장에 취임하여 104명의 입학생으로 개교하였으나, 1922년 3월 일제에 의해 관립으로 개편되어 일본인 교장이 부임하였다. 1925년 4월에는 제1회 졸업생 38명을 배출하였다.
1924년 6월 일본인 선발팀과의 야구시합에서 한인 차별의 편파적인 판정을 내리자 이에 대한 항의로 3개월간 동맹휴학하였으며, 1926년에 광주농림고등학교 학생들과 항일 비밀결사인 성진회(醒進會)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1928년에는 2·3학년 학생 전원이 독립선언문을 작성하고, 식민지교육에 대항하여 제2차 동맹휴학을 결행하였다. 1929년에는 광주농림고등학교·광주사범학교·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와 독서회·광주학생소비조합을 결성하여 항일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러던 중 1929년 10월 30일 나주역에서 일본인 남학생이 광주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재학중인 한국인 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계기로, 박준채(朴準埰) 등의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과의 충돌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 사건을 계기로 한·일 학생 간의 충돌이 계속되다가, 11월 3일 일본의 국경일인 명치절에 광주고등보통학교 학생들과 일본인 학생들이 다시 충돌하자 광주의 각 학교 한국인 학생들이 합세하였다.
그 후 편파적인 보도를 일삼는 일본인이 경영하는 광주신문사를 습격하고 대대적인 시위를 전개, 마침내 전국적으로 확산되면서 광주학생독립운동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로써 많은 학생들이 일제에 의해 검거되거나 퇴학당했지만, 불굴의 항일 독립의지를 나타내고 민족정신을 드높인 역사적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그 뒤, 1938년 4월에 5년제 광주서공립중학교로 개편되었으며, 광복 후 초대 교장에 강신태(姜信泰)가 취임하였다. 1951년에는 3년제 광주고등학교와 광주서중학교로 분리되었다가, 광주고등학교는 1953년에 광주제일고등학교로 개편되었다.
1953년에 정부는 11월 3일을 ‘학생의 날’로 제정, 이듬해 교정에 광주학생독립운동기념탑을 설립하여 학생들의 항일 독립정신을 기리고 있다. 1972년 2월에 중학교 평준화시책에 따라 광주서중학교는 졸업생 1만 4,303명을 배출한 뒤 폐교되었다.
1998년 3월 EBS 위성 교육방송 시교육청 시범학교로 지정지정되어 1999년 10월 EBS 위성 교육방송 활용 시범학교 운영 발표회를 하였다.
1999.11.03 70주년 광주학생독립운동 기념 행사를 주관하였으며 김대중 대통령 내외분과 각부 장관, 시도 교육감등이 참석하였고, 김대중대통령이 ‘민족의 자랑! 1929년 학생독립운동’의 휘호를 썼다.
2000년 11월 시 교육청 지정 교육정보화 운영시범학교로 선정되었다. 2001년 4월 도서실 정보화 사업 구축하였고, 2001년 7월, 한국어 선택학교의 미국 중 고교 교장단 40명이 방문하였다.
2002년 1월 학교경영 우수학교로서 교육감상을 수상하였고, 2002년 2월 본교 3학년 이동현이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상"의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2002년 4월 표준 보건실을 설치하였다. 2003년 1월 학교교육활동 우수학교로서 교육감상을 수상하였고, 2003년 2월 본교 3학견 홍성우가 "21세기를 이끌 우수인재상"의 대통령상을 수상하였다.
2004년 광주시교육청 지정 과학교육 시범학교로 선정되었으며, 2008년 12월 학교평가 우수학교로 선정되어 교육감 표창을 수상하였다. 2009년 12월 종합장학 우수학교 표창을 수상하였고, 대학수학능력 성적 최우수학교 표창을 받았다.
2010년 2월 현재 제 85회 졸업식으로 총 4만 2,102명의 졸업생을 배출하였다.
체육활동으로는 야구부와 하키부가 전국규모 대회에서 각각 20여회 우승, 8회 우승 등의 좋은 성적을 올리고 있다.
광주제일고등학교의 교훈은 ‘다하라 충효, 이어라 전통, 길러라 실력’이며, 매년 음악, 미술, 문예, 연극 등으로 구성된 ‘무등제’가 개최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