괴산 미륵산성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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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산 미륵산성 성벽
괴산 미륵산성 성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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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포곡식으로 축조된 통일신라의 성곽. 산성. 사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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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충청북도 괴산군 청천면에 있는 남북국시대 포곡식으로 축조된 통일신라의 성곽. 산성. 사적.
내용

해발 642m 도명산(道明山)의 정상과 계곡을 아울러 돌로 쌓은 포곡식(包谷式) 산성으로, 도명산성이라고도 부른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돌로 쌓았는데, 둘레는 5,779척이고 우물 2곳이 있지만, 지금은 허물어졌다고 하였다.『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여지도서(輿地圖書)』·『대동지지(大東地志)』등에도 같은 내용이 실려 있다. 그 뒤『조선보물고적조사자료』·『문화유적총람』에는 구체적인 내용이 조금 더 추가되었다.

1996년에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에서 학술조사를 실시하였다. 성벽의 둘레는 5.1㎞에 이르는데, 돌로 쌓은 부분이 3㎞가 넘는 큰 규모이다. 성 안에는 물이 풍부하고 생활공간도 충분하여, 외적이 침입하였을 때 주민들이 농성하기에 알맞은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다.

성벽은 지형에 따라 속을 다지고 겉을 돌로 쌓은 내탁(內托) 방식과 속에 흙이나 돌을 넣고 안팎을 돌로 쌓은 협축(夾築) 방식으로 축조되었다. 성문은 서쪽·동쪽·북쪽에 있었는데, 서문이 가장 규모가 크고 전형적인 구조로쌓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곧 서문은 구조가 확인되지 않았지만, 성 안의 물이 빠지는 수구(水口)가 있는 지점이고, 수구문의 안쪽에는 지름 약 20m 안팎의 집수시설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서문에 사용된 주춧돌에는 얕은 축수혈(軸受穴)이 있고, 주좌(柱座)는 흔적만 남아 있다.

서문 남북쪽의 산기슭에는 수구문과 서문을 지키기 위해 쌓은 작은 외성(外城)이 자리하고 있다. 외성은 지형상 성문을 방어하고자 성문 앞을 가려 쌓은 옹성(甕城)을 만들 수 없는 곳에 설치된 것이므로, 방어하기에 가장 취약한 계곡을 보강하는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성문 바깥에 외성을 만들어 성문의 방어력을 높인 유적은 아직 확인된 바가 없으므로, 이와 같은 외성은 매우 희귀한 사례이다.

성 안에는 모두 8곳의 건물터가 확인되었다. 건물터가 밀집된 지역은 조청골·서당골·수정골이라 불리는 골짜기가 한데 모인 산성의 중앙부이다. 북쪽과 동쪽, 남쪽의 계곡물이 합류하는 남향한 경사면은 건물터가 위치한 곳이면서 공간이 가장 넓게 확보된 곳이기도 하다. 20여년 전까지만 해도 건물터에는 사람이 살았다고 전한다.

성 안에서는 기와·도기 조각·자기 조각 등과 함께 돌로 만든 절구와 숫돌 등이 발견되었다. 기와에는 선조무늬〔線條文〕·생선뼈무늬〔魚骨文〕·복합무늬 등이 주로 새겨져 있고, 자기류는 청자와 백자가 주종을 이룬다.

출토된 유물이나 축성 기법으로 보아, 산성을 처음 쌓은 시기는 통일신라 말기인 9∼10세기경으로 보인다. 그 뒤 고려시대에 거란과 왜구의 침입, 조선시대에 임진왜란 때에도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참고문헌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여지도서(輿地圖書)』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대동지지(大東地志)』
『괴산미륵산성 지표조사보고서』(차용걸·노병식·강민식, 충북대학교 호서문화연구소, 1996)
『한국의 성곽과 봉수』(한국보이스카웃연맹, 19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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