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2년 9월 풍수지리가 이의신(李懿信)의 상소로 제기되어 광해군의 깊은 관심을 끌었다.
천도의 이유는 서울의 지기(地氣)가 다했다는 것인데, 그 증거로 임진왜란, 누차의 모반사건, 격화된 당쟁, 그리고 서울근처 산림의 황폐 등을 들었다. 그 대신 새로운 길지로서 이의신은 교하를 건의하였는데, 대부분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논리였으며, 강화도와 인접하여 전략상 유리하다는 점도 들었다.
여기에 혹한 광해군은 1613년 정월 대신들에게 비밀교서를 내려 교하지역을 답사하도록 하였으나, 이러한 계획은 삼공(三公)을 비롯한 모든 신하들의 반대를 받았다. 이에 왕은 “천도가 아닌 이궁(離宮)을 지을 뿐”이라고 회유하였으나, 승정원ㆍ삼사 및 기타 관원들의 끈질긴 간쟁으로 결국 이루어지지는 못하였다.
천도에 대한 반대 이유는 서울이 정치ㆍ군사ㆍ경제 등의 입지적 조건에서 천혜의 요지인 반면, 교하는 그 평탄한 지형 때문에 외적의 방어에 불리하고, 많은 인구를 지탱하기 위한 음료수와 연료 및 재목의 조달이 어려우며, 민심의 동요와 국고의 고갈을 초래한다는 것이었다. 이로 인해 교하천도론은 발의단계에서 저지되었으나, 조선 후기 사회불안에 따른 풍수도참설의 유행과 서울의 지기 쇠약의식이 보편화되는 계기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