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능성(綾城). 자는 신숙(愼叔), 호는 청계(淸溪). 능성(지금의 전라남도 화순군) 출생. 아버지는 구현경(具玄慶), 작은아버지는 대사간 구방경(具方慶)이며, 어머니는 나주정씨(羅州鄭氏) 정희영(鄭希英)의 딸이다.
약관에 기대승(奇大升)의 문하에 들어가 수학하였다.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경전연구에 힘썼다. 특히 지용(智勇)을 겸비하여 여가에 무경(武經)을 익혔다.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 고경명(高敬命)이 의병을 모집하자 쌀 1백여 석을 군량미로 내놓고 자신도 의병에 가담하여 금산에서 싸웠다.
주장인 고경명이 전사한 후 우의병장 최경회(崔慶會)를 보좌하여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 황간·영동·금산·무주 등지에서 적과 싸웠다.
그 이듬 해 최경회와 함께 진주성에 합류, 김천일(金千鎰)·고종후(高從厚)·황진(黃進) 등 여러 의병장과 합세하여 적과 싸우다가 6월 29일 성이 함락되자 주장 최경회, 문홍헌(文弘獻)과 함께 강물에 투신자살했다. 그는 시를 잘하여 싸움터에서 쓴 진중시(陣中詩)를 많이 남겼다.
또한, 평소 효심과 우애가 남달리 강하여 이를 나타내는 시문이 몇 편 전한다. 그의 부인은 담양전씨(潭陽田氏)로 장인인 전용관(田用灌)도 금산싸움에서 전사하였다.
1625년(인조 3) 군기시주부(軍器寺主簿)에 추증되고, 숙종 때에는 정려가 내려지고 통정대부(通政大夫)에 가자되었으며, 1860년(철종 11)에 다시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능주(綾州)의 포충사(褒忠祠)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청계집(淸溪集)』 3권 1책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