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음악과 무용의 보존과 보급, 그리고 국악의 연구와 발전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국립국악원은 문화관광부 소속기관으로 전통예술을 보존 계승하기 위한 전속예술단과 각종 공연진흥, 교육진흥 및 지원임무 등을 수행하는 행정부서, 한국음악학 정립의 사명을 수행하고 있는 국악연구실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밖에 전문자료관인 국악박물관을 운영하고 있으며, 지방국악활성화를 위해 전북특별자치도 남원시에 민속국악원을 분원으로 설치 운영하고 있다.
역사적으로 신라의 음성서(音聲署), 고려의 대악서(大樂署), 조선의 장악원(掌樂院)과 관련되었고, 민족항일기의 이왕직아악부(李王職雅樂部)와 광복 이후 구왕궁아악부(舊王宮雅樂部)에서 유래되었다.
1913년 아악대(雅樂隊)를 아악부로 개칭함으로써 시작된 이왕직아악부는 서울 종로구 당주동 128번지에 있었던 봉상시(奉常寺)의 주고(酒庫)를 수리하여 청사로 쓰다가, 1925년 종로구 운니동 98번지에 새로 지은 청사로 옮겨 활동하던 중 광복을 맞았다.
초대 국악사장 김종남(金宗南)에 이어서 함재운(咸在韻, 2대) · 명완벽(明完壁, 3대) · 김영제(金寗濟, 4대) · 함화진(咸和鎭, 5대) 등이 대를 이었고, 1920년부터 아악생을 모집하여 장악원의 전통을 계승시켰다. 이러한 전통이 광복 이후 구왕궁아악부를 거쳐서 국립국악원으로 전승되었다.
1948년 구왕궁아악부의 대표 이주환(李珠煥)은 아악원(雅樂院) 국영(國營)에 관한 청원서를 국회에 건의하였고, 제115회 국회 본회의에서 청원 결의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다. 이로써 1950년 1월 19일 대통령령 제271호로 국립국악원의 직제가 공포되었다.
처음에는 문교부의 산하 독립기관이었고, 6·25전쟁으로 인하여 개원이 늦어지다가 1951년 4월 10일 부산에서 비로소 개원했으며, 초대 원장은 이주환이었다.
환도 이후 1954년 10월 1일 문교부령 제38호에 의하여 국악사양성소(國樂士養成所)를 부설하였고, 1961년 10월 2일 정부 기구의 개편에 따라서 문교부에서 문화공보부로 이관되었으며, 1967년에는 운니동 청사에서 현재의 국립국악고등학교로 이전하였다.
그 뒤 1973년 8월 25일 종합민족문화센터 건립계획에 따라 현재 국립극장 자리로 옮겼다가 1988년서울특별시 서초구 서초동에 있는 예술의 전당으로 이전하였다. 1992년남원시에 국립국악원 소속하에 민속국악원을 개원하였으며, 1998년 문화관광부소속으로 변경되었다.
부설교육기관은 1954년 10월 1일 문교부령 제38조에 의하여 <국악사양성소규정>이 공포되었고, 그 해 10월 7일 대통령령 제946호에 의하여 문을 열었다. 1955년 봄부터 학생 30명을 모집하여 교육을 시작하였다.
1958년 2월 21일 문교부령 제73호에 의하여 3년의 수업연한이 6년으로 연장됨으로써 1961년 제1기생 17명을 배출하였다. 1962년 정원을 30명에서 60명으로 증원하고 동시에 남자 40명과 여자 20명의 남녀공학제를 실시하였으며, 1972년 7월 11일 대통령령 제6279호 <국악고등학교설치령>의 공포에 의하여 3년제 국악고등학교로 개칭되었다. 1991년 3월 4일 남녀 구분 없이 학년당 2학급 100명의 각종학교인 국악학교로 개교하여 국악의 조기 교육 실현에 한발 앞서게 되었다. 1999년 2월 현재 졸업생 수는 교명 변경 전을 포함하여 39회로 남학생 564명, 여학생 2,200명 도합 2,764명에 이르고 있다.
공연활동은 크게 국내공연과 해외공연으로 구분될 수 있다. 국내공연은 정기 행사에 따른 중앙공연, 전국을 순례하는 지방공연, 귀빈들의 국립국악원 방문 때의 원내 연주(院內演奏), 외부기관의 요청에 의한 원외 연주, 방송국에 출연하는 방송 연주로 구성된다.
정부에서 치르는 중요한 정기행사는 종묘대제(宗廟大祭) · 석전제(釋奠祭) · 현충사다례(顯忠祠茶禮) · 영릉다례(英陵茶禮) · 칠백의총다례(七百義塚茶禮) 등이다.
해외공연은 1964년 3월 일본의 요미우리신문사(讀賣新聞社)의 초청으로 시작되어, 1966년 제2차 도일공연과 1967년 대만공연이 있었다. 1972년 미국의 아시아학회(Asia Society) 초청으로 미국과 캐나다 공연이 있었고, 1973년 프랑스 등 유럽공연이 있었다.
1975년 일본 문부성(文部省) 초청의 아시아민속예술제 참가 공연, 1976년 영국 더럼대학교(Durham大學校) 개최의 동양음악제 참가 공연, 1977년 서독방송국 초청의 유럽공연, 1978년 홍콩에서 개최한 제3회 아시아예술제 참가 공연이 있었다.
1979년 5월 미국 캘리포니아에서 한국미술 5천년전 개막공연이 있었고, 그 해 11월 한국미술 5천년전을 위한 미국 및 캐나다 순회공연, 1980년 유럽 순회공연, 1981년 아메리카 순회공연이 있었으며, 2000년 현재까지 약 2백여회의 해외공연을 개최하였다. 국립국악원의 독립적인 해외공연 이외에 국립극장에서 매년 외국으로 파견하는 한국민속예술단에도 함께 참가하여 해외 연주활동을 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의 주요 사업은 악서 간행, 악보 출간, 음반 제작, 악기 개량, 국악 창작, 국악 강좌, 국악 감상, 국악 강습 등이 있는데, 민족음악의 보급과 발전을 목적으로 한다.
악보 발간사업은 5선보로 채보한 ≪한국음악≫(1969∼현재), 정간보(井間譜)와 율자보(律字譜)로 채보한 ≪국악전집≫(1974∼현재)이 대표적인 것이다. 악서 간행사업으로는 고악보나 악서를 영인, 출간한 ≪한국음악학자료총서 韓國音樂學資料叢書≫(1979∼현재)가 있고, 음반제작은 ≪한국음악선집(韓國音樂選集)≫(1972∼현재)으로 현재도 진행중이다.
악기 개량사업은 1964년 국악기개량위원회 설치 이후 1967년 개량 국악기 전시회를 운니동 청사 전시실에서 개최하였고, 1969년 두번째 전시회를 국립공보관에서 개최하였으나 1971년 해산되었다. 그 뒤 국악기 개량사업은 잠시 중단되었다가 1980년 편종 · 편경 제작자문위원회를 구성하여 국악의 기본음을 측정하였으며, 1981년에는 대금 규격화 및 거문고와 가얏고의 음량 증대에 관한 연구를 하였다.
국악 창작 활동은 1950년대 김기수에 의해서 거의 독보적으로 진행되어 왔으나, 1962년 국립국악원이 신국악 작곡을 공모함으로써 신진들에 의해서 새로운 방향으로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1962년부터 1968년까지 매년 신국악 작품을 공모하여 8회까지 계속하다가, 1969년 문화공보부가 신국악 작품의 공모사업을 대행하였다. 10여년 동안 총 공모 작품 66편 가운데 입선작 20편이 국립국악원에서 발표되었다. 이러한 창작활동을 근거로 하여 1970년대 신국악 작곡활동이 젊은 세대들에 의해서 활발히 전개되었다.
국악 감상은 1956년부터 1970년까지 계속하다가 중단되었고, 국악 강좌와 국악 강습은 매월 정기적으로 개최되면서 오늘에 이르고 있다.
중요 소장품은 악기 · 악서 · 악보 · 녹음테이프로 구분할 수 있다. 편종과 편경은 이왕직아악부시절 이전부터 전승된 중요한 악기들이다.
≪대악후보(大樂後譜)≫(7권) · ≪속악원보( 俗樂源譜)≫(5권) · ≪현금동문유기(玄琴東文類記)≫ · ≪신증금보(新證琴譜)≫ · ≪삼죽금보(三竹琴譜)≫ · ≪금보초입문(琴譜初入門)≫ · ≪금보≫ · ≪서금가곡 (西琴歌曲)≫ · ≪가곡원류(歌曲源流)≫ · ≪시경악보(詩經樂譜)≫ · ≪금학총서(琴學叢書)≫ 등이 중요한 고악보이고, 진양(陳暘)의 ≪악서(樂書)≫와 ≪악학궤범≫ · ≪시악화성(詩樂和聲)≫ · ≪율려정의(律呂正義)≫ · ≪악률전서(樂律全書)≫ 등이 중요한 악서들이다.
그 밖에 중요한 문헌으로 ≪시용무보(時用舞譜)≫ · ≪정재무도홀기(呈才舞圖笏記)≫ · ≪진연의궤(進宴儀軌)≫ · ≪무도홀기집≫ · ≪홀기진설도(笏記陳設圖)≫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