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은 150인이다. 50인씩 3개국(局)으로 나뉘어 편성되었다. 이들은 일반병사들 중에서 무예시험을 통해 선발되었는데, 기원은 1637년(인조 15) 남한산성 방어전에 참여하였던 병사들 중에서 무예시험에 합격한 1,384인을 7개국으로 나누어 영숙문(永肅門 : 창덕궁의 후원으로 나가는 문)을 지키게 한 데서 비롯되었다.
이를 무용청(武勇廳)으로 불렀는데, 효종 때 인원수를 줄여 5개국으로 만들었다가 다시 4개국으로 만들었고 1663년(현종 4)에 3개국으로 정비하였다. 이들에게는 병조에서 급료를 지급하였고, 훈련도감에서는 봄·여름에 무명과 삼베를 각 1필씩 급여하였다.
1685년(숙종 11) 3개국에서 각기 10인씩 차출하여 무예청(武藝廳)에 배속시켰고, 1783년(정조 7) 이를 다시 분리하여 장용위(壯勇衛)를 설치하였다. 1802년(순조 2) 장용위가 폐지되자 원액 30인은 다시 훈련도감의 3국에 복귀되었다. 이들은 다시 둘로 나뉘어 영숙문과 숭지문(崇智門 : 창경궁의 북문)을 지키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