굴식 고분 (굴 )

고대사
유적
주검을 안치하는 방[玄室]의 한 벽면에 출입로가 있는 내부구조의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 횡혈식석실분.
이칭
이칭
횡혈식고분(橫穴式古墳)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주검을 안치하는 방[玄室]의 한 벽면에 출입로가 있는 내부구조의 무덤을 지칭하는 용어. 횡혈식석실분.
개설

굴식 고분[橫穴式古墳]은 구덩식[竪穴式]무덤과 대조적인 개념이다. 넓게 보아 앞트기식 고분[橫口式古墳]이나 굴무덤[橫穴墓]도 굴식 고분의 범주에 포함시킬 수 있지만 그 구조면에서 차이가 드러나므로 각자를 개별 묘제로 분류하는 것이 관행이다. 굴식과 앞트기식의 구분은 출입로에 석재나 벽돌로 시설한 연도(羨道)의 유무에 있다. 즉, 복도의 의미를 지닌 연도를 갖춘 구조를 굴식, 그것을 갖추지 않은 구조를 앞트기식이라고 한다. 이에 비해 굴무덤은 경사지나 단애면에 굴처럼 파서 그 안에 주검을 안치한 것으로, 한반도에서는 충청남도 공주 일원에서만 확인되어 극히 한정적 범위와 기수로 나타나는 무덤형태이다.

굴식 고분은 그 내부구조가 돌방, 벽돌방, 돌·벽돌 혼축 등 다양한 형태가 있는데 그 가운데서도 주종을 이루는 굴식 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은 중국의 영향을 받아 한반도 서북부에서 먼저 나타나고 삼국시대에 이르러서는 가장 보편적인 묘제로 자리 잡게 된다.

연원 및 변천

굴식 고분은 전국 각지에 분포하는데, 대개 굴식 고분이 앞트기식 고분보다 크거나 축조상태가 정연(整然)한 예가 일반적이어서 양자 간에 피장자의 위상이 어느 정도 반영된 것으로 추정된다. 한편, 굴식 고분과 유사한 것으로써 입구부만 있고 무덤방 규모가 비교적 작고 좁은 것은 앞트기식 돌덧널무덤[橫口式石槨墓]로 부르기도 한다.

기능상으로 보면, 굴식 고분은 재래의 단장용(單葬用)인 구덩식 무덤에 비해서 추가장용(追加葬用)으로 발전된 구조 형태이다. 무덤방의 벽체나 천정을 훼손하지 않고 추가장을 할 수 있도록 축조 과정에서 아예 출입시설을 달아내고 필요에 따라 폐색재(閉塞材)를 헐고 막을 수 있도록 만든 구조다. 따라서 피장자 한 사람을 위해 조성한 일회성 무덤이 구덩식이라면, 굴식은 하나의 무덤 속에 2인 이상의 피장자를 차례로 안장할 수 있는 경제적인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물론 고분을 완성한 다음에 단장으로 끝난 것들도 있으나, 원래 기능에 따라 추가장을 한 고분이 절대 다수를 차지한다. 고구려와 백제의 굴식 고분에는 한 번만 추가한 이인장(二人葬)이 다수인데 비해, 신라의 그것은 비교적 많아 최다 십인장(十人葬)까지 확인된 바 있다.

굴식은 이미 청동기시대의 고인돌[支石墓]하부구조에서도 나타나고 있으나 그것이 삼국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이어져 축조된 것으로 보기는 어렵다. 지금까지 확인된 역사시대의 굴식 고분은 대동강유역의 낙랑고분 중에서 처음 나타나고 있다. 낙랑의 덧널흙무덤[木槨封土墳]단계에서 굴식은 한 기만 확인되었을 뿐이지만, 그 다음의 벽돌방흙무덤[塼室封土墳]단계에는 거의 모두 굴식으로 축조된다. 이어서 굴식이되 석재를 사용한 돌방흙무덤[石室封土墳]과 돌방돌무지무덤[石室積石塚]이 병존하고, 다시 돌방흙무덤으로 통일된 다음에 통일신라시대까지 이어지며, 고려시대에는 왕릉이나 지방의 일부 호족 무덤으로 명맥을 유지한다.

내용

전축(塼築)에서 석실로 교체되는 시점의 굴식 고분은 낙랑의 최말기부터 고구려로 병합된 직후에 해당하는 4세기 전엽의 굴식 돌방무덤인 남정리 119호분이다. 4세기 중엽이 되면 벽돌과 석재를 혼용한 과도기적인 전석(塼石) 혼용도 나타나지만 결국 돌방무덤 일색으로 정착하게 된다. 이처럼 고구려의 대동강유역에서 유행한 돌방무덤은 이후로 압록강 이북이나 한반도는 물론이고 일본열도까지 파급되었다. 6세기 중엽에 이르면, 굴식 돌방무덤의 시대라고 할 수 있을 만큼 크게 유행하기 시작한다.

고구려의 굴식 고분은 집안(集安) 도읍기 후기 중에서 종전의 구덩식을 벗어나 방형 돌무지무덤[方形積石塚]의 새로운 내부구조 형태로 전개된다. 집안의 대표적인 대형분은 태왕릉(太王陵)과 보다 발전된 형태인 장군총(將軍塚)이 있다. 이와 같은 고분은 가공석재를 사용한 계단식 돌무지무덤의 상부 중앙에 석실을 축조하며, 그 위를 성토하고 기와를 입히는 점이 특징이다. 장군총은 대형 돌방돌무지무덤의 마지막 단계이며, 그 석실의 형태는 5세기 후엽 이래로 돌방흙무덤의 굴식 구조에 조형(祖形)이 된다. 거의 모두 굴식 구조인 고구려 흙무덤이 압록강 이북에서 출현한 시기는 평양천도 이전 혹은 이후라는 두 가지 견해가 있으며, 봉토분과 일부 중·소 돌무지무덤의 굴식 구조는 발해 고분의 구조로 이어진다.

평양을 중심으로 하는 압록강 이남의 고구려 고분은 평양천도와 더불어 돌무지무덤과 기존의 흙무덤이 병행한 시기를 거치고 5세기 후반으로 접어들면 돌방흙무덤 일색으로 통일된다. 구전된 동명왕릉(東明王陵)이나 한왕릉(漢王陵)처럼 평양 도읍기의 전기 왕릉으로 추정되는 방형 흙무덤에는 계단식 돌무지무덤의 잔영인 기단을 구비하고 장군총의 석실 형태를 답습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의 돌방은 둘 혹은 셋을 구비하거나 하나의 돌방에 같은 규모로 여러 칸을 둔 예들도 있다. 이를 각기 쌍실분(雙室墳), 삼실분(三室墳) 혹은 다실분(多室墳)으로 지칭하며 그 연원은 주로 낙랑계 고분에서 찾지만, 다실분은 요서(遼西) 지역 돌방무덤에 기원을 두고 있다. 그 밖에도 전실(前室)의 좌, 우로 혹은 좌우로 이은 측실분(側室墳: 혹은 龕室墳)이 있는데, 5세기 후엽이 되면 단실분 일색으로 획일화되어 이른바 단실분의 시대로 접어든다.

백제의 돌방무덤은 한성기(漢城期) 후기부터 시작해서 웅진기(熊津期)를 거쳐 사비기(泗沘期)가 되면 대체로 크기가 작아진 장방형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웅진기의 무령왕릉과 송산리 제6호분을 포함한 일부 대형분은 중국 남조(南朝)의 벽돌방무덤[塼室墳]을 채용하였다. 당시 전라남도와 경상남도 남해안의 일부 고분들은 일본 북큐슈[北九州]에서 유행했던 돌방 형태도 보여 그 때가 국제적인 문화교류가 왕성했던 시기였음을 보여주기도 한다. 사비기의 성왕릉(聖王陵)으로 추정되는 능산리고분군 중하총(中下塚)의 돌방 형태는 동상총(東上塚) 형태로 변모하고, 이어서 종전의 2인(부부)용에서 1인용 구조로 되면서 점차 백제 전역이 중앙의 고분양식으로 통일된다. 한편, 백제의 할석조 석실분의 축조형태는 소맥산맥을 넘어 고아동벽화고분(古衙洞壁畵古墳)처럼 대가야의 최고지배층 무덤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끼쳤다.

신라 왕경(王京)인 경주에서는 6세기 중엽부터 장방형 앞트기식 고분을 축조하기 시작했는데, 그 때는 이미 5세기 중엽부터 신라의 북부와 동부에서 세장방형 앞트기식이 유행하기 시작한 것에 비해 1세기 가량 늦다. 더구나 경주 중심부에 굴식 고분의 등장은 앞트기식 고분보다 반세기 가량 더 늦지만 그 뒤로 통일신라시대까지 대형분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석실의 석재는 할석(割石), 벽돌과 비슷한 모양의 전상석(磚狀石), 정밀치석한 전석(塼石)·판석(板石)으로 구분된다. 정밀하게 가공한 석재가 할석보다 늦게 나타나는 것은 석재 가공기술의 발전을 의미하고, 굴식 돌방무덤의 시기적 추이에도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 가공도가 높은 석재는 고구려, 백제, 신라의 순서로 적용되었고, 가야는 그러한 기술이 도입되기 전에 신라에 병합됨에 따라 가야무덤에서는 가공석재를 사용한 예를 찾을 수 없다.

석실의 천정 구조는 모양과 함께 규모, 석재 가공도, 크기, 축석방식 등이 복합적으로 적용되었다. 천정 형태의 다양성은 고구려, 백제, 신라·가야의 순으로 나타나는데, 각기 공통적으로 많은 형태는 할석조의 평천정(平天井)과 반구형천정[穹窿天井]이다. 그 밖의 특징적인 천정을 보면, 가공석재로 축조한 고구려 중·대형분의 천정은 앞뒤로 굽히거나 네 면을 굽힌 절천정(折天井), 계단 모양으로 내밀어 좁힌 평행좁힘천정[平行藻井天井], 삼각형으로 걸쳐 내밀어 좁힌 삼각좁힘천정[抹角藻井天井], 두 기법이 결합된 반구형+평행좁힘천정, 반구형+삼각좁힘천정, 평행+삼각좁힘천정 그리고 팔각천정(八角天井)이 있다. 백제의 돌방은 맞조임천정, 터널천정, 맞배천정, 평사천정(平斜天井)이 있으며, 신라의 돌방은 주변지역에 넓은 천장석인 반구형평천정[穹窿平天井]이 많다.

연도나 묘도의 위치는 전벽 중의 한 부분(중간·우·좌)을 차지하지만 소형 장방형 돌방 중에는 전벽 전체를 통로로 활용하기도 한다. 바닥에는 높고 낮은 관대(棺臺)나 시상대(屍床臺)와 배수구(排水溝)가 시설된 고분들도 적지 않다. 한편, 생택(生宅)과 유사하도록 배려한 고급 돌방 중에는 현문부(玄門部) 혹은 현문부·연문부(羨門部)에 문틀시설과 문[石扉·木扉]을 갖추기도 한다. 전자에는 중방(中枋)·지방(地枋)·문주(門柱)와 동개[軸穴], 후자에는 문장부[軸部]와 문고리가 달린 나무를 박았던 홈[環座]이 시설된 것도 적지 않다. 특히 생택 효과를 높이도록 후실(後室) 입구 양측에 돌기둥을 세운 쌍영총(雙楹塚)이나 그것과 함께 넓은 방을 지탱하기 위해 여러 돌기둥을 설치한 안악3호분(安岳3號墳)과 같은 예 등 실로 다양한 구조형태를 보인다.

수많은 굴식 고분 중에는 내부에 미장한 예들도 많지만 특히 고구려 돌방무덤에는 천연색 그림, 윤곽선, 채색 그리고 묵서(墨書)가 확인된다. 전·중기에는 면회(面灰) 바탕이 많으나 후기에는 치석면(治石面)에 직접 그리거나 쓴 것들이 많다. 이러한 유형의 돌방무덤은 고구려 120기 내외, 백제 2기, 신라 3기, 가야 1기가 알려져 있으며 화재(畵材)는 대체로 인물풍속도→인물풍속도 및 사신도(四神圖), 도안화된 연화(蓮花)→사신도의 순서를 보인다.

의의와 평가

굴식 고분은 삼국 공통으로 정착된 묘제로서 구조상 다른 어떤 형식의 무덤보다도 각 부위의 구성과 축조방식이 다양하여 가장 발전된 형태의 무덤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각 나라별, 지역별로 성행했던 토목·석재가공·건축기술의 내용과 함께 도입과 성행 그리고 전파 과정을 통해 당시의 고분문화나 고대사 및 미술사를 복원하는 데 중요한 자료가 된다.

참고문헌

『고구려벽화고분』(최무장·임연철, 신서원, 1990)
『한국고고학개설』(김원룡, 일지사, 1988)
『백제고분연구』(강인구, 일지사, 1977)
「신라석실고분의 연구」(최병현, 『숭실사학』 5,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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