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경소(景韶), 호는 지촌(芝村). 아버지는 권석년(權錫年), 어머니는 죽산박씨(竹山朴氏) 박기현(朴琪鉉)의 딸이다.
시 공부를 위해 황현(黃玹)의 문하가 되었으나, 글은 종조인 권형규(權亨圭)에게 배워 학문의 기초를 닦았다.
나중엔 뜻이 맞는 학인(學人)들끼리 글을 회독(會讀)하면서 간혹 종조를 찾아가서 의문을 푸는 방식을 택하였다. 어릴 적부터 시재(詩才)가 탁월했던 그는 군(郡)에서 보인 백일장에 입선해 시명(詩名)을 얻기도 했으며, 22·23세 때 본격적인 시 공부를 위해서 백운산(白雲山) 만수동(萬壽洞) 구안실(苟安室)로 황현(黃玹)을 찾아가 그의 문인이 되었다.
7∼8년 동안 시 공부를 한 뒤에도 월곡촌(月谷村)으로 이사한 황현을 자주 찾아가 문학을 강론하곤 하였다. 또 스승 황현이 신교육의 필요성을 제창하자 그는 여러 문인들과 스승을 도와 마을에 사립 학교를 설립, 3∼4년 동안 운영하기도 하였다.
그는 여러 문인 가운데서 스승의 신임이 가장 두터워 황현은 늘 “나와 교류하는 이들은 많지만 믿고 일을 맡길 자는 오직 경소(景韶: 권봉수의 자) 뿐이다.”고 하였다. 황현이 순절하자 『매천집』을 간포(刊布)하고, 그의 유지(遺志)를 실천하는데 정력을 쏟았다.
그의 시명(詩名)은 영호남에 국한되지 않고 거국적이었으며 김택영(金澤榮)·윤종균(尹鍾均)을 비롯하여 왕수환(王粹煥)·이병호(李炳浩)·왕재소(王在沼) 등 당시의 문사들과 문학적인 교류가 깊었으며 김천택의 『연암집』 간행에 참여하기도 하였다.
그는 황현의 시맥(詩脈)을 이은 시인으로 정인보(鄭寅普)는 그의 시풍을 평해, “세연토양지풍(?然土壤之風)은 수백 년 간 1인뿐이라.”고 극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