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예술연구회 ()

극예술연구회 단체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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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
단체
1931년 진정한 의미의 신극 수립을 목표로 서울에서 창단되었던 극단.
이칭
이칭
극연
정의
1931년 진정한 의미의 신극 수립을 목표로 서울에서 창단되었던 극단.
개설

극예술연구회(劇藝術硏究會)는 극연좌(劇硏座)의 전신으로, 1931년 7월에 발족하여 1938년 3월 일제에 의해 강제해산된 연극 단체이다. 약칭 ‘극연(劇硏)’이라도고 한다.

창립동기는 극영동우회(劇映同友會)에 의한 연극영화전람회로 되어 있으나 동우회는 형식에 불과하고, 그 이전의 동인모임인 막우회(莫友會)가 그 모태이다.

외국문학을 전공한 동경유학생들인 김진섭(金晉燮)·서항석(徐恒錫)·유치진(柳致眞)·이하윤(異河潤)·이헌구(李軒求)·장기제(張起悌)·정인섭(鄭寅燮)·조희순(曺喜淳)·최정우(崔珽宇)·함대훈(咸大勳) 등 10명이 주동하여 연극계 선배 윤백남(尹白南)과 홍해성(洪海星)을 영입한 12명의 동인으로 구성했다. 이들은 7월 4일 당시 전동식당(典洞食堂)이라는 음식점 2층을 빌려 극예술연구회 창립총회를 열고 창단하였다.

설립목적

창립취지는 ‘극예술에 대한 일반의 이해를 넓히고, 기성극단의 사도(邪道)에 흐름을 구제하는 동시에 나아가서는 진정한 의미의 우리나라에 신극(新劇)을 수립’하는 데 있었고, 상업주의에 의거한 신파극(新派劇) 위주의 연극풍토를 개혁하려는 강한 의지를 표방하여 우리나라 신극의 확립방향을 뚜렷이 하였다.

연원 및 변천

극예술연구회는 전기·후기로 나누어볼 때, 전기는 1931년부터 1934년 말까지이다. 1931년 8월 기반구축작업에 착수하여 하계강좌를 열고 연구생을 모집한 후 1931년 11월 직속극단인 ‘실험무대’를 조직하고 신인연기자를 확보했다. 이러한 준비과정은 동인들이 거의 무대경험이 없고 기성배우는 기용하지 않겠다는 당초의 방침을 고수했기 때문이다. 1932년 5월 제1회 시연회로 니콜라이 고골리(Nikolay Gogol) 작·홍해성 연출「검찰관(Revizor)」을 무대에 올렸다. 당시 언론은 1923년 토월회(土月會)의 제2회 공연 이후 ‘10년 만에 보는 최대의 수확’이라는 호평을 하였다.

이후 7회까지 공연된 작품은 1932년 6월 제2회 라인하르트 괴링(Reinhard Goering) 작「해전(海戰)」, 1933년 2월 제3회 유치진 작「토막(土幕)」, 1933년 7월 제4회 조지 버나드쇼(George B. Shaw) 작「무기와 인간」, 1934년 4월 제6회 헨리크 입센(Henrik Ibsen) 작「인형의 집」, 1934년 12월 제7회 안톤 체호프(Anton Chekhov) 작 「앵화원」등이 있다. 주로 홍해성과 유치진이 연출하고, 동인(同人)들이 번역을 맡았다.

이 기간의 공연은 장·단막극을 합쳐 14편인데 그 가운데 유치진의 창작극 2편을 제외한 12편이 번역극이고, 번역극 중에서도 절대다수가 북유럽 중심의 근대연극이었다. 서구 근대사실주의를 도입하여 우리나라 신극의 기틀을 마련한 최초의 성공적 기도였던 반면 창작극의 토착화라는 극연 고유의 목표에는 미치지 못했다. 한편 동인들에 의한 비평활동과 1934년 기관지『극예술』을 창간·간행하였다.

극예술연구회의 후기는 1935년 이후부터 1938년 3월 해산되기까지로, 그 성격은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창작극의 개발과 직업적 전문화로의 전환이 그것이다. 극단 초기에 주로 번역극을 공연했으나, ‘고답적 입장에서 대중을 멀리하고’ 있으며 ‘조선의 감정에 맞지 않는다’는 동인들의 비판이 일어나자 창작극에 더 애정을 쏟았다. 이 때문에 유치진을 필두로 이무영(李無影)·이광래(李光來)·이서향(李曙鄕) 등의 신인극작가 배출되어 창작극의 새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이 기간의 주요공연작품은 1935년 1월 제8회 이무영 작「한낮에 꿈꾸는 사람들」, 1936년 2월 제9회 톨스토이(Tolstoi) 작「어둠의 힘」, 1936년 4월 제10회 이광래 작「촌선생」, 1936년 5월 제11회 유치진 작「자매(姉妹)」, 1936년 9월 제12회 유치진 각색「춘향전」, 1936년 12월 제13회 칼 쇤헤르(Karl Schonherr) 작「신앙과 고향」, 1937년 1월 제14회 헤이워드(DuBose Heyward) 부처(夫妻) 작「포기(Porgy)」, 1937년 2월 제15회 유치진 작「풍년기(豐 年期)」(원작「소」의 개제), 1937년 4월 제16회 톨스토이 원작「부활」등이다.

1935년 11월부터 1937년 4월까지의 18개월 동안 9회를 공연한 것도 이례적이며, 총 18편의 작품 중 8편이 창작극임은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극단 전기와 달리 연극전문극장으로 공연장소가 옮겨졌다는 점도 눈 여겨 볼만 하다. 홍해성이 1934년 말「앵화원」연출을 끝으로 극단을 떠난 이후, 유치진과 서항석이 사실상 극단 운영을 맡았다.

이 시기의 번역극은 ‘난삽(難澁)하고 침통한’ 북구계통 희곡에서 탈피해「부활」같은 상업주의적 성향이 뚜렷한 작품을 공연하였다. 그러나 이 시기의 가장 큰 변화는 일제의 가혹한 작품검열이었다. 이미 6회 공연 때 존 골즈워디(John Galsworthy) 작「은연상(銀煙箱)」이 검열에 저촉되어 공연이 좌절된 데 이어 8회 공연으로 예정된 유치진 작「소」가 검열에서 통과되지 못하였고, 대신 선정된 심재순(沈載淳) 작「줄행랑에 사는 사람들」, 한태천(韓泰泉) 작「토성낭」, 오케이시(O'Casey) 작「쥬노와 공작(孔雀)」등도 모두 검열을 통과하지 못했다.

뿐만 아니라 연극동인에 대한 잦은 일경(日警)의 소환(召喚)과 더불어 심문(審問)·투옥(投獄)이 잇달았고 극단은 일종의 사상단체로 지목받았다. 따라서 1938년 3월 해체가 불가피하게 되었으며, 동인 중 서항석·유치진만이 남아 극연좌로 재출발하기에 이르렀다.

기능과 역할

극예술연구회의 신극사적 의미는 근대 서구 사실주의의 도입·정착을 통한 본격적 신극 수립이었다. 이 극단은 1920년대의 토월회가 신파극의 극복을 위해 앞장서서 이룩한 공적을 이어받아 신극운동을 본격화시켰으며, 시대배경, 창립동인의 인적구성 및 자질, 운동 목표의 명확한 인식, 상업주의의 비타협적 배격, 범문화계적 호응 등 여러 요인으로 해서 토월회식 좌절과 변질을 극복할 수 있었다.

의의와 평가

극연좌 시기를 포함한 8년이라는 장기간 활동을 지속했던 것은, 그간 큰 변질 없이 운동을 지속해나갔으며, 극단 내부의 중대한 의견대립 또는 분파작용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 크게 작용한 것이다. 또한 재정적 안정 기반 없이도 극단을 운영하는 노력이 계속되었으며, 다각적으로 연극운동을 펼쳐나갔다는 데 그 요인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민족항일기 말기의 가혹한 문화탄압의 일환으로 연극계의 여러 숙제를 미처 풀지 못한 채 활동을 중단해야 했던 것은 우리나라 신극의 발전을 위해 적지 않은 불행을 낳았다.

참고문헌

『한국 근·현대 연극 100년사』(한국 근·현대 연극100년사 편찬위원회, 집문당, 2009)
『우리연극 100년』(서연호·이상우, 현암사, 2000)
『유치진 연극론의 사적전개』(박영정, 태학사, 1997)
『극예술연구회의 연극론 수용 양상연구』(김호연, 홍익대학교 석사논문, 1995)
『한국 희곡사 연표』(민병욱, 국학자료원, 1994)
『한국연극-연극사적 자서전』(서항석, 한국연극협회, 1976. 12/1977. 1․2)
『한국신극사연구』(이두현, 서울대학교출판부, 1966)
『한국현대희곡사』(유민영, 홍성사, 1982)
『창극작가수업30년』(유치진, 현대문학 제1권 제5호)
「극단 신협사 연구」(정주영, 동국대학교 석사논문,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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