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7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이 금동관음보살입상은 1907년 충청남도 부여군 규암면 규암리에서 출토되었다. 당시 일본 헌병대의 손을 거쳐 전 소장자인 니와세[庭瀨博章]가 가지고 있던 것이다. 원래는 뚜껑이 덮인 무쇠 솥에서 또 하나의 관세음보살상과 함께 발견되었으나 현재 이것은 이치다[市田次郎]의 후손이 보관하고 있다고 한다.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복판(覆瓣: 아래로 향한 꽃잎)으로 된 둥근 연화대좌 위에 똑바로 선 자세를 취하고 있다. 머리에는 삼면보관을 쓰고 있는데, 앞면에는 화불이 조각되어 있고 정상에는 보계(寶髻)가 높직하며 양쪽으로 관대가 튀어나와 있다.
전반적으로 보아 얼굴이 약간 크고 둥글며 몸은 가늘고 긴 편이나 신체적인 비례는 잘 맞는다. 두 뺨이 통통하고 눈은 가늘게 약간 옆으로 올려져서 표현되었으며, 자그마한 입에 부드러운 미소를 짓고 있다. 귀는 작은 편이고 양쪽에서 내려온 머리칼이 어깨까지 닿아 있다.
가느다란 목걸이를 걸쳤고 가슴에 대각선으로 둘려 있는 상의는 두 줄의 선각으로 표시되어 있다. 양어깨로부터 늘어진 구슬장식[瓔珞]은 허리 부분에서 자그마한 연화장식을 중심으로 교차되었다. 군의(裙衣)는 허리에서 한 번 접혀서 내려와 발등까지 덮였는데, 양다리 위에는 가는 음각선으로 옷주름을 나타내고 있다.
오른손은 어깨 옆으로 들어서 엄지손가락과 집게손가락으로 구슬[寶珠]을 잡았으며, 왼손은 내려서 양어깨에서 부드럽게 늘어뜨린 천의(天衣) 자락을 살짝 잡고 있다. 두 팔뚝과 팔목에는 팔찌를 낀 표시가 간단한 선으로 표현되었다.
뒷면에는 밋밋한 면에 X자형으로 구슬장식을 앞의 것과 연결되어 걸쳤고, 일부 옷의 주름을 간단히 표현하려는 시도가 엿보인다. 대좌는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 위에 원형의 대가 놓여 있으며, 여기에 표현된 복판연화문은 짧은 판단(瓣端)의 활달한 팔엽연화이다.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얼굴에 나타나는 자연스러운 미소나 비례에 맞는 몸의 형태, 부드럽고 생기 있는 조각적인 표현에서 기술의 진보와 세련성을 보여 주고 있어 백제 말기의 발전된 조각 양식임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아직은 몸의 자세가 꼿꼿이 선 굳은 느낌이 남아 있고 옷주름이 단순한 음각선으로 처리되었으며, 구슬장식이 단순하며 그 표현에는 약간의 투박한 감이 없지 않다. 또한 신체의 형상이나 세부 표현이 섬세하지 않다. 하지만 전체적인 조형성으로 보면 탄력감이 있고 통일된 형태감을 주고 있다.
삼면보관, 두줄의 U자형 천의, 어깨끈 달린 승각기, 영락장식의 조합 등은 중국 수대(隋代) 보살상에서 찾아볼 수 있는 특징이다,
부여 규암리 금동관음보살입상은 수나라의 불상 양식과 연관이 있으며, 경상북도 선산(현 구미시) 출토의 구미 선산읍 금동보살입상(국보, 1976년 지정)은 이 같은 계열의 양식을 좀 더 발달시킨 형태로 보인다. 또한 이 보살상에서 나타난 X자형으로 길게 늘어진 구슬장식은 7세기에 들어와서 유행하는 삼국시대 보살상 표현의 한 특징이라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