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1940년 5월 평안북도 평양시 평천리에서 병기창 공사를 하던 중 출토된 상이다. 전면에 녹이 많이 슬었고 오랫동안 흙 속에서 침식된 흔적이 뚜렷하며, 불에 탄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머리에는 삼산관(三山冠)을 쓰고 얼굴을 약간 숙여 사색에 잠겨 있는 모습이다. 얼굴은 직사각형으로, 눈은 반쯤 감겨 있고 코와 입은 작은 편이며 입가에는 고졸(古拙)한 미소가 나타나 있다. 머리 뒷부분에는 굵은 꼭지가 있어 두광(頭光)이 달려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닿아 있다.
상체는 나신으로 몸통이나 팔 등이 길고 가냘프며 팔에 팔찌를 끼고 있을 뿐 다른 장신구는 보이지 않는다. 두 손은 가늘고 긴 원통형으로 왼손은 내려뜨려 오른쪽 발목 위에 놓았으며, 오른손은 팔꿈치 이하 부분이 떨어져 없어졌다. 그러나 팔꿈치를 오른쪽 무릎 위에 대고 있는 것으로 보아 원래는 손가락을 볼에 대고 있는 사유형(思惟形)이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왼쪽 다리는 내려 연화족좌(蓮華足座) 위에 올려놓고 오른쪽 다리는 왼쪽 무릎 위에 얹어 전형적인 반가(半跏)의 자세를 취하고 있다. 허리에 걸친 상의(裳衣)는 무릎 위에서는 선각으로 주름의 형태만 간략히 묘사되다가 대좌를 덮으면서 자연스럽게 늘어져 여러 겹의 수직 주름을 형성하고 있다.
보살이 앉아 있는 대좌 밑에는 타원형에 가까운 복련대좌(覆蓮臺座)가 표현되었으며, 앙련(仰蓮: 위로 향하고 있는 연꽃잎)이 받치고 있는 족좌(足座)가 마련되어 보살상의 왼발을 받치고 있다.
전체적으로 얼굴이 큰 편으로, 가냘픈 몸매와 묘한 대조를 이루면서 사색에 잠긴 보살의 모습을 특징적으로 표현하였다. 양식적으로 보면 동위(東魏)나 북제(北齊) 초기의 반가사유상의 양식을 보여주는 것으로서, 조성 연대는 대개 6세기 후반으로 추측된다. 출토지가 확실한 고구려의 반가사유상으로서 주목되는 작품이다. 이 상이 출토된 곳에서 영강(永康) 7년(418)의 명문이 있는 주형 광배(舟形光背)가 출토되었으나, 양식적인 면으로 보아 이 상과는 관련이 없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