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적이 소재한 지점은 금성산(錦城山)의 한 지맥이다. 이 고분은 1973년 3월경 새마을사업 중 발굴되었다. 발굴결과 파괴된 돌방무덤〔石室古墳〕에서 토기 10점이 수습되었을 뿐 고분의 구조양식은 확인할 수 없었다.
토기에는 병·항아리·굽다리접시 등의 종류가 있는데, 그 특징은 다음과 같다. 병1은 구연부가 반구형(盤口形)이며, 목이 짧은 납작바닥의 작은 병이다. 높이 11㎝, 입 지름 4.1㎝, 바닥 지름 9.6㎝, 몸통 지름 14.4㎝이다. 병2는 아가리가 약간 벌어지고 목이 짧으며 몸통은 타원형인데, 마치 달걀을 옆으로 놓은 것처럼 퍼졌고 낮은 굽이 달려 있다.
어깨에는 작은 원문이 띠를 이루었고 가는 선이 둘려져 있다. 높이는 11㎝이다. 병3은 둥그런 몸체에 낮은 귀때〔注口〕가 붙어 있으며, 바닥은 넓은 납작바닥이고 몸통에 물결무늬가 둘려져 있다. 이러한 형태의 병은 대체적으로 6∼7세기 전반시기의 것으로 추정되며, 비슷한 형태의 병은 창녕 계성리 C구 1호분, 울주 화산리 2호분 등에서도 출토된 예가 있다.
굽다리접시〔高杯〕는 3점인데, 1개는 뚜껑이 없는 형식으로 몸통은 깊이가 깊고 안바닥은 넓고 편편하여, 몸통이 기둥처럼 수직으로 내려와 있다. 그리고 몸통에는 5개의 가는 선이 둘려져 있으며, 3개의 귀가 수직으로 달려 있다. 입 지름은 11.7㎝이다.
굽다리접시 중 나머지 2개는 같은 형식에 속하는 것이다. 몸통은 반구형(半球形)으로 역시 뚜껑없이 사용하는 것이다. 낮고 두터운 굽다리가 붙어 있으며, 몸통과 굽다리에 3줄의 가는 선이 둘려져 있다.
이 곳의 토기들은 질과 형식에 있어서 경주지방보다는 낙동강 중류지방의 가야형식과 많이 닮았다. 이 점은 고분의 구조가 전형적인 가야지역 형식인 점과 함께 문화계통을 짐작케 해주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는 이 지방이 신라와 백제의 국경지대이고, 또 남쪽으로 소백산맥이 가로놓여 있는데도 유독 가야계의 문화가 형성되어 있는 점에 특별히 주목할 만하다. 그리고 이런 류의 돌방무덤은 금산지방이 북한계선이 된다.
그러나 토기, 즉 반구형의 아가리를 가진 작은 병은 연산지방에서도 몇 점 발견된 바 있어 북으로 넓게 확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돌방무덤과 토기들의 연대는 부여천도 후인 6세기 후반 이후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