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와카야마현(和歌山縣) 구마모토시(熊本市)우전팔번신사(隅田八幡神社)에 소장되어 온 우전팔번신사소장인물화상경(隅田八幡神社所藏人物畵像鏡)의 제작자이다.
이 동경은 현재 일본의 국보(考古 제2호)로 지정되어 현재 동경국립박물관(東京國立博物館)에 보관되어 있다. 동경 가장자리를 따라 도드라지게 “癸未年 八月日十 大王年 男弟王在意 紫沙加宮時 斯麻念長奉(壽)遣開中費直穢人今州利二人等 取白上同二百畢 作此鏡(계미년 팔월일십 대왕년 남제왕재의 자사가궁시 사마념장봉(수)견개중비직예인금주리이인등 취백상동이백필 작차경)”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명문의 해석과 동경의 제작연대, 수수(授受)의 주체 등에 관해 많은 연구가 있고, 해석을 두고 한·일 학자들 사이에 상당한 시각 차이가 있다. 이 동경의 제작연대는 계미년(癸未年)과 남제왕(男弟王)을 근거로 할 때, 443년설, 503년설, 623년설 등이 있는데 503년설이 유력하다.
남제왕에 대해서는 응신천황(應神天皇)설, 윤공천황(允恭天皇)설, 인현천황(仁賢天皇)설, 계체천황(繼體天皇)설 등이 있는데 남제는 계체천황의 휘(諱)로 계체천황설이 유력하다.
그리고 이 동경을 사마념장이 만든 것으로 보는 견해와 사마(斯麻)를 백제 무녕왕(武寧王)으로 보고 무녕왕이 이 동경을 만들어 남제왕에게 하사한 것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무녕왕릉 출토 지석에서 무령왕의 휘(諱)가 사마라는 것이 밝혀져 사마가 백제 무녕왕이며, 따라서 계미년도 무녕왕 재위기간인 503년이라는게 확인되고 있다.
개중비직(開中費直)에서 개중은 지명으로 가와치(河內)로 보고 있다. 이곳은 백제군이 있었던 지역으로 한반도로부터 많은 사람들의 이주가 있었던 곳이다. 비직(費直)은 백제에서 사용됐던 관명으로, 개중비직은 카와치에 정착한 백제계 귀족 도래인으로 동경제작 당시 왜왕과의 매개 역할을 맡았다고 추측하고 있다.
금주리는 우전팔번신사소장인물화상경을 직접 제작한 장인(匠人)으로 동경을 만들던 기술자의 직책 또는 직업명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예인금주리(穢人今州利)”라는 명문에서 금주리가 예계(穢系)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예족은 고대 동예(東濊) 지역을 포함하여 현재의 강원·영서·경기 북부 지역에 분포하던 종족이다. 이 지역은 낙랑군(樂浪郡)과 대방군(帶方郡)이 장악하고 있었는데 고구려가 이들을 몰아낸 뒤 백제는 예 지역을 차지하기 위해 고구려와 상쟁하였다. 금주리는 이 과정에서 포섭된 장인의 후손이든지, 무녕왕대 고토(故土) 회복을 위해 북진하는 과정에서 백제에 귀부한 예족 인물로 보인다. 무엇보다 금속제품을 만드는 수공업에 관계하고 있었던 듯하다.
무녕왕이 우전팔번경 제작에 그를 동원했으므로 청동원료의 채취와 선별 그리고 제작에 일가견을 가진 인물이었음이 분명하다. 또한 명문에서 ‘예인 금주리’라고 그의 연고지를 밝힌 것은 금주리가 백제에서도 자신의 연고지인 예 지역 광산에서 원료를 공급받거나, 현지 장인들과 연계를 맺거나, 제품을 공급받거나 혹은 기술지원 등 지속적인 관계를 유지해 온 것이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이와 같은 연구를 통해 우전팔번경은 503년 8월 무녕왕이 일본 하내(河內)지역에 거주하던 백제계 도래인 개중비직과 예인 직책 또는 직업명이 금주리인 두 사람을 파견하여 양질의 백동(白銅) 200덩어리로 동경을 만들어 남제왕에게 전달하였다고 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