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행주(幸州). 자는 가구(可久). 기축(奇軸)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기찬(奇禶)이고, 아버지는 응교 기준(奇遵)이며, 어머니는 윤금손(尹金孫)의 딸이다.
1546년(명종 1)에 식년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여 청환직(淸宦職)을 두루 역임하고, 1551년 평안도암행어사로 나가 민폐를 살폈다.
이듬해 이조정랑을 거쳐 1553년 헌납이 되었다. 1554년 사간이 되고 이어 전한·직제학이 되었다. 1556년에는 황해도관찰사를 거쳐 이듬해 용양위대호군에 임명되었다. 1558년(명종 13) 춘천부사로 나가 3년간 선정을 베푼 뒤 예조·호조참의를 역임하였다.
그 뒤 1561년 대사간으로서 재변소(災變疏) 6조목을 올려, 경천(敬天)·법조(法祖)·무학(務學)·납간(納諫)·임현(任賢)·애민(愛民)에 힘쓸 것을 건의하였다. 1563년 부제학이 되었는데, 당시 권신이던 이량(李樑)이 사화를 일으켜 사류들을 숙청하려 하자, 심의겸(沈義謙) 등과 함께 이량의 죄상을 폭로하였다.
이때 이량을 옹호하던 사헌부의 죄상도 함께 탄핵하여 이량을 강계로 귀양보내고 그 일파도 관직을 삭탈하는 한편, 새로 등용된 사림들을 옹호하였다. 이어 대사헌이 되고 이조참판을 거쳐, 1564년 공조참판·한성부판윤에 발탁되었다. 시호는 정견(貞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