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탈정기복(奪情起復)’이라고도 하는데 중국 남북조시대에 비롯되었다. 나라에 전쟁이나 반란 같은 위급한 일이 있을 때, 장수·대신직에 유능한 인물을 동원해 활용하기 위한 방편이었다.
고려시대에는 985년(성종 4)에 오복제(五服制)가 제정되었는데, 992년부터 6품 이하의 관리들은 모두 1백일 만에 기복해 직무를 수행케 하고, 나머지 상기 중에는 참복(黲服 : 검푸른 옷)과 연각(耎角 : 연한 각대)을 착용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단상(短喪 : 삼년상의 기한을 짧게 줄여 한 해만 복을 입는 일)의 풍조를 조장하게 되어 고려시대에는 백일 탈상이 보편화되었다.
조선시대에는『가례』에 따른 삼년상의 이행이 강조되면서 기복제의 운용도 본래 취지대로 엄격히 제한되었다. 또, 기복된 관리는 사은(謝恩 : 임관 뒤 왕에 대한 사례)이나 사행(使行: 사신가는 일) 때만 길복(吉服)을 입고 일체의 조회에 참석하지 않으며, 공무 수행 때는 옥색 옷을 입지만 집안에서는 상주로서의 예법을 다하게 하였다. 그러므로 기복이 되었더라도 연회에 참석하거나 처첩을 맞이하지는 못하였다.
조선시대의 기복에는 까다로운 절차가 요구되었는데, 먼저 예조에서 해당자와 사유를 왕에게 상주해 왕의 윤허가 승정원을 통해 내려오면 대간에 서경(署經)을 요청하였다. 대간에서 적격자라는 회답이 있어야 만이 비로소 해당자에게 복직명령서를 발부하게 되는데, 이를 기복출의첩식(起復出依牒式)이라 한다.
이러한 과정을 거쳐 기복된 사람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몇 사람에 지나지 않았다. 태조 때의 남재(南在), 세종 때의 황희(黃喜)·김종서(金宗瑞), 세조 때의 최항(崔恒)·허종(許琮), 선조 때의 김명원(金命元)·이덕형(李德馨)·곽재우(郭再祐)·이순신(李舜臣), 인조 때의 구굉(具宏)·김상헌(金尙憲) 등이 기복의 명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