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업인(雜業人) 또는 잡색인(雜色人)이라고도 하였다.
잡학이라고 불린 기술학에 종사하는 관직자들을 총칭하였는데, 역관·의관·천문관·지관(地官)·산관(算官)·율관(律官)·화원(畵員)·도류(道類 : 도사)·금루(禁漏)·악생(樂生)·악공(樂工)·상도(尙道)·지도(志道)·화사(畵史)·공제(工製)·공조(工造)·재부(宰夫)·선부(膳夫) 등이 있었다.
이 가운데 역관·의관·천문관·지관 등은 정3품 당하관까지 올라갈 수 있는 상급 기술관이었으며, 산관·율관·화원 등은 종6품 전후에서 관직을 떠나는 하급 기술관이었고, 악생·악공·상도·화사·공제·재부·선부 등은 잡직 기술관이었다. 상·하급 기술관은 조선 사회의 중간 계층인 중인에 속했고, 잡직기술관들은 상민·천민층에 속하였다.
기술관들의 전문지식이나 기능은 국가 운영과 정치 실무에 필수적인 것이었다. 고려시대에는 율·서·산 등의 잡학이 유학과 함께 국자감에 정규 교과로 설치되어 있었고, 기술관에 대한 차별대우가 심하지 않았다. 그들의 지위는 양반관료 밑에 있었지만 역시 문반의 일부로 편제되어 있었다.
그러나 고려 말 성리학이 수입되고 사대부 계층이 신흥관료세력을 형성하여 조선이 건국되자, 유학 이외의 전문기능직에 대한 차별의식이 생기게 되었다. 이는 사대부들이 관념적으로 기술을 천시하는 의식과 함께 자신들의 특권과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다른 직종을 하급신분층으로 계층화하여 자신들과 구분하고, 문·무 양반관직으로의 진출을 억제하려는 의도에서였다.
조선시대의 기술관들은 먼저 각각의 기술학에 입학하여 전문지식을 습득한 뒤 잡과(雜科)나 잡학취재(雜學取才)를 통하여 등용되었다. 이를 위하여 여러 종류의 잡학이 설치되었는데, 사역원(司譯院)·전의감(典醫監)·관상감·호조·형조·도화서(圖畵書)·소격서(昭格署)·장악원(掌樂院) 및 각 지방 관아에서 각기 운영하던 역학·의학·음양학·산학·율학·화학(畵學)·도학·악학(樂學) 등이 그것이다.
여기에 속한 기술학 생도의 총수는 ≪경국대전≫에서 6,736인으로 파악되고 있다. 조선 초기에는 양반자제들도 잡학에 입학했으나 점차 천시되어 회피했고, 마침내 중인들의 전문분야가 되어 그들의 전문지식과 기술을 세습하게 되었다.
15세기말부터 이들은 독특한 신분계층을 형성하여 양반계층에 섞일 수 없게 되었고, 그들도 다른 신분의 기술관 유입을 배척하게 되었다. 양반관료들은 기술관들을 천시했으나 전문직의 효용과 필요성 때문에 상호간에 밀접한 유대를 가지게 되었고, 이 때문에 조선사회의 하급지배층을 형성하게 되었다.
기술관들은 제도상 당상관에 오를 수 없었고 직전(職田)도 받지 못하는 등의 차별을 받았으나, 실제로는 개인적 공로에 의하여 당상의 품계에 오른 자들이 많았고 지방수령으로 진출하기도 하였다.
그들은 또 전문기술로 경제적 안정을 누릴 수 있었는데, 특히 역관들은 사행(使行)을 통한 무역에 종사하여 부를 축적하였다. 이러한 경제적 기반을 배경으로 그들은 조선 후기부터 신분타파를 주장하고 신문화의 수입과 의식의 개혁에 앞장서 근대화의 선구적 구실을 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