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술교육 ()

직업훈련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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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념
인간이 자연을 생활에 유용하도록 개변, 가공하는 일체의 활동을 교육하는 교육행위.
정의
인간이 자연을 생활에 유용하도록 개변, 가공하는 일체의 활동을 교육하는 교육행위.
개설

일정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행동의 수단을 교육하는 것도 의미한다. 따라서 도구적 동물인 인간의 역사는 곧 기술교육의 변천과정이라고도 할 수 있다.

석기시대의 기술교육은 일상생활 중에서 도구 제작·불의 사용·수렵·식물 채취 등을, 교육의 원초적인 형태인 보고(모방), 되풀이하고(훈련), 익히는(학습) 일련의 형태로 이루어졌다.

고대사회로 갈수록 일상생활에서의 여러 관습이나, 일상적인 것을 제외한 특수한 것은 비의전수(秘儀傳授) 의식이나 형태 속에 담고자 하였다. 즉 기술적인 절차나 그 이행은 모두 초자연적인 힘에 의해서 강하게 지배받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게 되었다.

그러다가 노예소유제 사회로 옮겨지면서 기술교육은 그 신비성을 상실하게 되었다. 전과는 달리 기술적인 작업은 고역(苦役)으로, 정신적인 작업은 고상한 것으로 인식되어, 기술은 사회의 하층구성원이 짊어져야 할 영역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기술교육의 형성과정·발달양상·형태 및 여러 분야를 명확하게 해명하는 데에는 많은 어려움이 있다. 그것은 역사를 기술(歷史記述)할 때 기술에 관한 내용은 제외되기 일쑤였고, 과거 어느 시대, 어느 문화권을 가릴 것 없이 기술자의 생존양식은 주목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기술문화의 유물은 그 실물이나 맥락이 곳곳에 남아 있으나, 기술행위는 대부분 익명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들의 행위는 기록보다는 구전(口傳)과 실물의 제작과정에 참여하면서 익혔고, 또한 전수되었다. 때로는 그 기술의 독점욕이나 경쟁자를 의식해서 특정한 후계자에게만 알려 주는 경우도 매우 많았다.

그러면서도 사회발달의 원인이자 산물인 기술의 개발은 완만히 진행되어갔고, 기술의 변화에 따라 인간의 생활도 변천되어 갔다. 따라서 기술의 변화는 인간의 감각, 정신생활뿐만 아니라 물질생산을 통해서 생활을 정착시키고 풍요하게 하여 오늘의 문화를 마련하는 계기가 되었다.

우리나라의 기술교육은 씨족사회가 부족사회로, 부족연합사회가 다시 왕권사회로 바뀌어 가는 동안 다양한 형태의 변화를 보여 왔다. 따라서 여러 진전의 단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다.

우리 교육사에서 체계적으로 파악할 수 있는 고등 기술교육의 영역은 후대에 잡학으로 일컬었던 천문·지리·악공·화공 등의 전문 분야를 들 수 있다.

한편 경공장(京工匠)·외공장(外工匠)에서 볼 수 있었던 정책적 전수제도의 테두리 속에 존재했던 영역과, 권력적 의지 및 보호와는 별개로 일상생활이나 사회생활 속에 계승되면서 존재했던 기술교육으로 대별될 수 있을 것이다.

형식이나 제도라는 측면에서 본다면 기술교육의 역사과정은 단순히 교수·학습이라는 교육행위만으로는 파악될 수 없다. 거기에는 경제와 사회, 그리고 노동의 역사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즉, 기술교육의 목적과 수단은 시대에 따라 실천되었던 여러 정책에서 그 본질이 설명될 수도 있다.

조선시대의 경우에도 장인(匠人)에 관한 법규 또는 제도가 예정하고 있는 것은 그 시대 기술의 이상이 표방되어 있으며, 그것이 또한 기술교육의 원칙으로 존재하였다.

근대가 되면서 기술교육도 과학이나 기술학의 지식을 배경으로, 일정한 기능을 토대로 표현되는 생산적 행동을 습득시키는 교육으로 변화되었다. 즉, 기술혁신의 변화에 적응하며, 또한 변화를 만들어 나가는 전이성(轉移性)과 창조성 있는 능력을 길러야 한다는 요청을 받게 된다.

전근대의 기술교육의 방법은 거의 도제제도(徒弟制度)가 중심이었으나, 이후 직업교육기관이 생기고부터는 기술을 지식과 기능의 두 측면으로 구분하였다. 이때 지식은 사고 행위를 통해서, 기술은 실습으로 습득시킨다는 방법이 일반화되었다.

그러나 오늘날 지식과 기능의 통합을 이루는 방법으로, 계통적인 기술 습득에 중점을 두는 기술교육의 조직화·효율화가 시도되고 있다.

한국기술교육사

삼국시대의 기술교육

단편적으로 전해 오는 기록이나 유물들을 중심으로 미루어 보건대, 삼국시대 이전의 생활에도 그 시대 특유의 의도적이며 체계적인 과정을 통해 산출되던 제작물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부여를 비롯한 고대국가가 농경사회로 전환되면서, 농업 경영기술에 뛰어난 자는 집단의 장로(長老)로 적절한 시기에 파종하고 김매며 수확하는 등 일련의 농사기술이나 체험을 전습(傳習)시켰다.

그러나 도입, 전파된 벼농사에서의 저수(貯水)·관개(灌漑)·종자 선택·농기구의 제작 및 수리 등은 무의식적인 반복이나 자연적인 방치상태에서는 전수가 불가능할 정도로 그 생산양식의 수준이 향상되었을 것이다.

또한, 고대국가 체제의 형성 및 강화는 권력기구의 팽창, 무기 제조의 개선 등에 따르는 기술의 요청과 분화가 불가피하게 증대되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삼국시대로 접어들어 왕권 중심적인 사회로 변모하면서, 특히 중국과의 잦은 교류로 산업·기술·문화면에서 변화가 가속화되었다. 왕권국가의 강화는 문화의 진보를 촉진시켰고, 이에 따라 기술교육에도 보다 조직적이고 의도적인 제도와 기법이 요청되었다.

구체적인 실례로 고대 왕조는 천체 운행(天體運行)에 비상한 관심을 기울였는데, 그것은 천체의 운행이 왕조의 운명과 결부된다는 신념체계에서 비롯되었다. 즉, 일월성신(日月星辰)의 정확한 운행과 그 변화를 관찰해서 왕조의 안녕을 확인하고자 하는 신앙적 요구와, 절기와 기상의 변화가 농경에 미치는 영향을 알고자 하는 현실적 요구에서 천체 관측은 절실한 것이었다.

이러한 필요에 따라 고구려에서는 그들의 독자적인 관측으로 천문도(天文圖)를 작성했음을 문헌적 기록이나 고분에서 발견되는 일월성신도(日月星辰圖)로 알 수 있다. 백제에서도 545년(성왕 23)에 역박사(曆博士) 고덕왕손(固德王孫)을, 602년(무왕 3)에는 관륵(觀勒)을 역서(曆書)·천문서(天文書)를 가지고 일본에 보냈다는 것으로 보아 이 분야의 수준이 상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에도 기상 관측에 관한 기록이 실려 있다. 신라에서도 천체·기상·지진현상 등에 관한 자세한 기록을 남겼고, 나중에는 첨성대(瞻星臺)와 같은 천체 관측기구를 만들기까지 하였다.

따라서 삼국시대에 들어서면서 사변적 학문으로 훈련된 일반 관료군과는 별도로 전문적 기술교육이 요청되는 분야가 특정 행정기구로 자리잡게 되었다. 물론 이러한 관제적(官制的) 체제에서 학습, 전수, 발전된 특정 분야의 기술교육 이외에도, 변화나 발전의 속도는 느렸지만 각 분야에 걸쳐 기술교육적 측면에서의 변화는 있었을 것이며, 또한 행해졌을 것이다.

특히 중국 문화권을 경유한 불교의 전래는 불교문화의 융성에 따른 공예기술의 발전을 가져왔고, 그것은 우리 민족의 문화내용이나 질을 바꾸어 준 계기가 되었다. 이러한 불교문화는 정신세계뿐만 아니라 그것이 요구하는 건축·공예·장식 등의 분야에서 전래적·토착적이었던 기술세계에 새로운 변화의 계기를 불러일으켰다.

따라서 사원문화(寺院文化)의 요청과 왕권사회의 강화로 인한 새로운 귀족문화의 수요는 이에 관계되는 분야의 전문가(기술인) 확보 및 양성을 요구하게 되었고, 이는 곧 기술교육의 변화를 가속화하였다.

삼국이 외래 문화의 이식과 모방의 수준을 넘어서서 독자적인 경지를 이룩하였다는 사실은 기술교육의 터전이 뒷받침되었음을 증언하는 것이다. 삼국이 남긴 공예품들은 그 정밀했던 기술을 알려 주고 있으며, 각종 석조물과 세공 장신구·금관·사리통(舍利筒) 등은 당시의 세공기술의 우수성을 구체적으로 증명하고 있다.

통일 이후의 신라는 농산물의 증가와 귀족 부호의 발생으로 수공업의 발달을 촉진시켰으며, 왕실·귀족·사원의 사치 수요와 조공(朝貢) 및 무역의 발달은 기술 분야의 활동을 더욱 촉진시켰다. 각종 무늬를 넣은 비단과 모시 등의 섬유제품과 각종 금은세공품·나전칠기·죽기(竹器)·도기(陶器) 등의 공예품이 산출되었다.

또 이러한 생산품의 교역은 통일 이전에는 경주에 동시(東市)를 감독하는 시전관(市典官)이 있었을 뿐이었는데, 통일 이후 동서 두 시장으로 불어나는 등, 신라는 농업국이면서도 활발한 대외무역을 계기로 상공업도 발전하였다.

후일 장보고(張保皐)로 상징되는 해상권의 장악은 신라의 진취적인 산업활동의 한 면으로, 그러한 다원적인 사회에서는 기술교육도 활발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삼국시대의 문화는 일본에 전파되어 고대 일본의 문화를 꽃피게 하였다.

조선 및 진(秦)·한(漢)의 귀화인들은 공예기술과 양잠·방직의 교사로서 일본의 재래문화를 비약적으로 발달시키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특히 백제인들이 일본에 건너가 학문 분야에서뿐만 아니라 산업 분야에서도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던 것은 백제가 사서삼경 등 학문적인 전파 외에도 산업기술에 상당히 심혈을 기울였던 것을 간접적으로 알려 주는 사실이다.

규모를 갖춘 왕권사회가 이루어지면서 국가를 관리하는 제반 정치·행정제도가 요구되고, 율령에 의거한 원칙 위에 왕을 정점으로 하는 하나의 국가기관이 운영되려면 각 부문별로 전문화가 요청되었을 것이다.

즉 부족사회의 족장처럼 단순한 경험이나 개인적 권위만으로 집단이 관리될 수 있었던 사회와는 그 성격을 달리하게 된다. 따라서 왕조의 기반이 다져질수록 일반 관직과 더불어 특수기능이나 기술을 전업으로 하는 특정 관서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관서는 그 부서가 담당하는 업무의 성격적 특성으로 일찍부터 도제적(徒弟的)인 형태로 후계자를 양성하기 시작했다. 백제의 관서를 보면 내관(內官) 쪽의 마부(馬部)·도부(刀部)·약부(藥部), 외관(外官)에 토목·공작을 관할하던 사공부(司空部), 직조를 담당하던 주부(綢部), 천문역학을 관장하던 일관부(日官部) 등의 부서가 있었다. 또한 전문적 기술직 관료라고 볼 수 있는 의박사(醫博士)·역학사(曆學士)·채약사(採藥師) 등이 편제되어 있었다.

통일 이후의 신라관제에도 토목·영선을 관장하던 예작부(例作府), 궁중음악을 담당하던 음성서(音聲署), 미술을 관장하던 채전(彩典), 천문관측을 관장하던 누각전(漏刻典) 등이 있었고, 각 분야는 나름대로 체계적이고 의도적인 기술·기능의 전수제도가 실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고려시대의 기술교육

후삼국의 분열을 재통합한 고려왕조는 토지제도의 전면적인 개편을 통해 새로운 기틀을 다져 나갔다.

농업 경영은 기본적인 터전이었기에 초기 성종 때에 왕이 솔선하여 풍년을 기원하는 기곡의식(祈穀儀式)과 예속 농민을 두고 몸소 경작하여 그 곡식으로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적전(籍田)의 예를 올려 백성들의 농사를 장려하고 농번기의 동원 금지, 농력(農曆)의 배포 등 생산능력의 확대를 꾀하였다.

고려시대의 농업기술은 우리 나라 농업의 기본적 윤작방식(輪作方式)인 2년3작의 경작법이 일찍부터 확립되어 반경(半耕)의 발달을 보게 되었다. 또 이와 동시에 쟁기[耒]·보습[耜]·가래[鍤] 등 농기구의 발달도 보게 되었다.

더욱이 저수지[堤池]·봇물[溝洑] 등 수리공사에 주력하여 수리기법 및 토목공법의 다양한 발전을 이루었다.

특히 농가에서는 미곡과 더불어 화폐 유통에 대체된 모시·삼베·비단 등 직물의 생산이 활발하여, 그 기능 전수과정이 존재하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관에서도 도염서(都染署)·잡직서(雜織署) 등의 공장을 운영하였으며, 거기에 소속된 계장(瀱匠)·금장(錦匠)·편장(編匠)·나장(羅匠) 등 공장(工匠)이 확보되어 있었다.

또한, 고려에서는 광산물의 생산이나 자기·금은동기·죽기·나전칠기·지물 등의 제작공장도 만들어졌는데, 그러한 전업적인 생산장소를 소(所)라고 하였다. 금소(金所)·철소(鐵所)·사소(絲所)·자기소(磁器所) 등에서 이들 생산품이 산출되어 공물(貢物)로 상납되거나, 혹은 상품으로 좌상(坐商)·행상(行商)·해상(海商)에게 넘겨졌다.

당시의 일용품이 아닌 특수상품은 대개 지배층의 사치나 사원용, 조공·무역에 따르는 수요에서 그 공급의 탄력성이 나타났을 것이고, 그러한 고급 물자 제작에는 그것을 뒷받침할 구체적 기술체계가 있었을 것이다. 특히, 비색청자·상감청자 등 도자기 제작의 기술비법은 고도의 문화 역량을 말해 준다.

그 밖에도 1234년(고종 21) 주조활자의 발명을 비롯해서, 전차(戰車)·과선(戈船)·대간포(大干砲) 등 각종 무기 제조는 고려의 과학기술 수준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그러나 생산자인 직인(職人)의 사회적 지위는 대부분 열악한 것이었다.

이들은 중세 유럽의 길드(guild : 同業組合)적인 단결권이나 직분에 따른 권익 옹호마저 제도적으로 확보하지 못하였다. 고려의 도공들도 대개가 관요(官窯:관청에서 쓰이는 도자기를 구워대던 가마)에 소속되어 자유롭게 업을 경영하지 못하고 결과적으로는 그 기술마저 단절되고 말았다.

제소(諸所)의 공장(工匠)들이 과중한 공물 징수를 감당하지 못해 도피까지 했다는 사례는 그 시대 기술교육체제의 취약성을 짐작하게 해준다. 고려의 관제는 당나라의 제도를 참작하여 마련된 것이었고, 기술기능을 전담하는 부서가 보다 분화, 확대되었다.

더욱이 광종 때부터 실시된 과거제도에서는 이미 초기부터 유학의 여러 정규 과목 이외에 의과(醫科)·복과(卜科)·천문·지리·음양학을 시험 보았고, 후일에는 기술관의 등용문인 잡과(雜科)로 그 범위와 위치가 확립되었다.

또한 고려 전기에는 관학인 국자감을 중심으로 유학(儒學)·무학(武學)과 함께 의학(醫學)·율학(律學)·서학(書學)·산학(算學)·음양학 등 기술학도 교육되었다. 이것은 고려왕조가 중앙집권체제를 강화해가고 있었다는 것과 함께, 조선시대와 비교하여 기술학이 상대적으로 덜 천시되었음을 뜻한다.

그러나 이러한 관학에서의 기술교육은 곧 부진을 보였고, 그 대신 각 해당 관청에서 실무교육으로 행해졌다. 그러나 기술교육이 이러한 관제적 형태(官制的形態)나 과정을 통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며, 여러 생산활동과 생산현장에서 민간에 의해 꾸준한 발전을 가져왔다.

조선시대의 기술교육

조선왕조에 이르러 문무관 중심의 양반관료체제가 형성되자, 기술직 전담 계층은 중인 신분이 자리잡게 되었다. 기술관의 신분은 중인층 이외에 양반계층에서 도태된 서얼 및 양인(良人) 신분에서 충당되었다.

1392년(태조 1) 8월에 제정된 입관보리법(入官補吏法)에 의하면, 7과(科) 중 기술과, 즉 잡과에 해당하는 것은 역과(譯科)·의과·음양과·이과(吏科)의 4과였다. 이 4과는 고려시대의 잡과에 비하면 율(律)·서(書)·산(算)·삼례(三禮)·삼전(三傳)·하론(何論)이 없어지는 대신 이과와 역과가 신설된 것이었다.

그러나 그 뒤에 조선 초기의 4과 중에서 이과가 없어지는 대신 율과가 추가되어 조선시대의 기술과는 역과·의과·음양과·율과로 정착되었다. 참고로 ≪경국대전≫과 ≪속대전≫에 수록된 기술직 생도 수와 과시(科試)의 최종 선발 인원을 비교해 보면 [표]와 같다.

[표]기술직생도수와과시선발정원

인원\과 역과 의과 음양과 율과
생도수 80(204) 80(118) 45(60) 40(80) 245(962)
선발정원 19(27) 9(11) 9(21) 9(11) 46(70)

주 : ( )안은 『속대전』.

조선왕조는 기술관을 양성하기 위하여 정규의 과거와 취재법 이외에, 여러 장학제도를 두어 정책적으로 기술학의 진흥을 꾀하였다. 특히, 조선 초기에는 농촌경제의 안정과 여러 문화정책의 성과에 힘입어, 기술과학의 진보도 괄목할 만한 것이었다.

먼저 농법에서는, 세종 때의 ≪농사직설 農事直說≫을 포함한 각종 농서의 보급으로 우리 나라 풍토에 적합한 농경방법의 개발이 활발하게 모색되었다. 또한 세종 때를 전후해서 농업과 관계가 깊은 천문기상학이 크게 발달하였다. 1442년(세종 24)에 만든 측우기는 서양보다도 200년이나 앞선 선진적인 것이었고, 그 밖에 대간의(大簡儀)·혼천의(渾天儀)·자격루(自擊漏) 등도 당시 왕성한 기술과학의 발달을 잘 대변해 주고 있다.

또한 의학 분야에서는 1433년에 ≪향약집성방 鄕藥集成方≫이 편찬되어 독자적인 의법(醫法)을 수립하였고, 각종 편찬사업의 추진은 인쇄술의 급속한 발전을 가져오게 하였다.

한편 국내에서 기술이 축적되어 있지 않은 분야는 귀화인에게서 그 기법을 전수받거나, 사신 편에 장인을 수행하게 하여 중국 기술을 배워오게 하였다.

그러나 기술학은 초기의 괄목할 만한 성장에도 불구하고, 그 지속적인 발전을 저해하는 근본적인 한계점을 가지고 있었다. 먼저, 양반관료 중심의 정치구조 속에서 기술직은 중인층 이하의 하급관리로 충당되어 사회신분적 차등을 감수해야만 했다.

또한 무농억말(務農抑末)의 유교적 이념이 지배하는 사회조건하에서 기술직을 천시하는 경향은 점차 심화되었다.

실제적인 기술 담당층인 장인들은 대부분 노비 신분으로 구성되었고, 따라서 그들에 의한 전문 기술과학의 이론적·원리적 발전을 기대하기는 매우 어려운 형편이었다.

이들 장인 계층의 기술 전수는 대부분 구전비법과 경험적인 방법을 전하는 범주에 한정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이들 장인 계층은 관장제(官匠制) 아래 예속되어 사장(私匠)의 활동이 정책적으로 제약되었으므로, 독자적인 기법 개발과 창의성 발현이 근본적으로 제약되었다.

특히, 초기에 명나라의 과중한 금은 조공의 압박을 벗어나기 위한 정책적 폐광 조처는 공업발전의 토대를 약화시켰고, 화폐경제의 발전을 정체시키는 요인이 되었다. 또 농촌경제는 자급자족적인 경제체제가 구축되어 시장경제체제로의 편입이 지연되었고, 이에 수공업이나 광범위한 산업발전의 토대가 성숙되기 어려운 실정이었다.

이러한 근원적 배경으로 인해 관수용(官需用)을 중심으로 제한적인 상권만이 공장(工匠)들과 연결되어 발전하였다. 이들 상인들은 후일 보부상(褓負商)이라는 전국적인 상인조직단체가 생기기 전까지는 주로 관설상가(官設商街)인 육의전(六矣廛)의 관납상역(官納商易)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태로 있었다.

이것은 곧 수공업자들도 관장수공업(官匠手工業)을 중심으로 하는 공장제도에 얽매여 위축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그러나 일반 민간의 수요를 위한 수공업이 아주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일반 백성은 도공·야장(冶匠) 등의 수공업 노동이라든가 농촌의 일상생활에서 길쌈 등의 제작활동을 통해 수요를 충족하였다. 이러한 수공업 노동은 대체로 농민의 부업으로 이루어진 것이 많으나, 승려 또는 사장인 도공·야장들의 수공업 노동도 거의 전업적(專業的)인 것이었다.

그러나 당시의 수공업 노동으로서는 그 규모와 기술면에서 관장들의 그것이 큰 비중을 가진 것이었고, 사장(私匠)의 경우 관장수공업하에서 침체를 면하지 못하였다. 즉, 사장의 경우 제작과정에서의 참여 및 가격 통제 등 각종 관의 간섭을 받았다.

그러나 후기에 이르러서는 관장수공업의 쇠퇴와 더불어 사장수공업이 발달하였으며, 종래에는 전적으로 관장에만 의존하던 관수도 차차 사공임용(私工賃用)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사장수공업의 발달은 특히 17세기 후반 이후 상업의 발달[鄕市·場市]과 관련된 것이며, 공인들의 방납제(防納制)가 결과적으로 교환경제의 발전에 공헌하게 되었음을 뜻하는 것이다.

조선시대 기술교육의 실상과 변천 양상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공장제도(工匠制度)에 대한 성격 규명이 요청된다. 조선 초기 공장의 신분 구성은 대체로 관노(官奴)와 천역양인(賤役良人)이 주가 되었다.

한편, 지방 공장인 경우에는 고려시대의 천민이나 귀화인들의 집단 부족으로서 향(鄕)·소(所)·부곡(部曲) 출신이 주가 되었다. 이들은 국가가 필요로 하는 금·은·구리·철·종이·도기·먹 등을 만들기 위한 천민 집단이나 죄인으로 이루어진 특수 집단이었다.

때로는 각 관아의 일반 노비로서 공장으로 편입된 예도 있었다. 이들은 노비 신분으로서 그 신역(身役)을 지는 방법으로 기술 계통에서 여러 작업에 종사하였고, 대개 어렸을 때부터 편입되어 기술을 습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이들 대부분의 공장은 사습자(私習者)가 없었으므로 각 사(司)의 어린 노자(奴子)로써 충당시켜 기성 공장에 결원이 생길 때마다 보충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노비 출신의 보충제도는 1434년(세종 16)에 와서는 양인 출신의 기술인으로 충당시켜 분번입역(分番立役)하게 하였으며, 점차적으로 정원 충원은 양인 가운데 능력 있는 자를 보충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처럼 공천(公賤)과 함께 양인들이 공장으로 진출하게 되자 천인 출신이 주를 이루던 공장을 대신하여 양인이 수공업계의 주인공으로 자리잡게 되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수공업은 노비 노동적 성격을 벗어나 양천병행(良賤竝行) 내지 양인 중심으로 점차 이행되었다.

초기의 공장 가운데에는 체아직(遞兒職:현직을 내놓은 문무관에게 주는 벼슬)을 배수받고 정식으로 관원[국가 기술요원]이 되는 자도 있었다. 관료국가적 체제하의 하층인에게 체아직은 소망하는 벼슬이었으며, 또한 제품 시장을 거의 갖지 못했던 공장들에게는 그 기술을 정규적으로 행함으로써 받는 급료로 호구책을 마련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였다.

관장제의 경우, 체아직을 받고 정규적인 국가의 기술 요원이 되어 그 제작활동 일체가 관가에 의해 관장되는 형태와, 규정 기간을 관역에 종사하고 나머지 시간은 자유기업[私營]에 종사하는 형태로 분류되었다. 또한 공장은 그 거주지별·등록지별로 경공장과 외공장으로 양분되었다.

경공장이란 한성부의 장적(帳籍:호적)에 등록되어 중앙 정부에 소속되어 있던 공장들을 가리키며, 30개 아문에 129종이 있었다. 외공장은 지방 관아에 등록되어 야장과 같은 일부 공장을 제외하고는 대부분이 농업을 경영하였으며, 다만 장적에 등록되어 일정한 기한을 관역에 종사하였다.

외공장은 27종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는 지방이 중앙에 비해 수요 품목이 적었음을 보여준다. 공장의 기술 전수는 직종별로 이루어졌으나, 조선 후기에 들어와서는 관장제가 왕조체제의 이완과 구조 개편으로 인해 붕괴되어 감에 따라, 직종별 전수제도도 크게 위축되었다.

이 때문에 기술 전수는 사장들을 중심으로 특정인이나 가계(家系) 내부에서 이루어지는 폐쇄성을 띠게 되었다. 조선 후기에는 사장들의 기술 축적이 이미 관장을 능가할 만큼 발전하였고, 일반민의 수공업품 수요도 증가하여, 사장이 후기 수공업계의 주체로 등장하였다.

실학의 기술교육론

조선 후기 실학파의 기술교육관은 전대의 그것과는 뚜렷한 변모를 나타내었다. 즉, 기술교육을 궁극적으로는 사회적·실천적 통합성에 두려고 하였다.

실학사상에서는 민중생활의 안정과 번영은 상공업의 발달과 전반적인 기술의 혁신 위에서 가능하다는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실학파는 이용후생론(利用厚生論)의 터전 위에서, 자원개발·상공업의 발전을 기하자면 먼저 침체된 기술의 누습(陋習)을 타파하고 선진 기술을 과감히 학습 수용함으로써 생산능률을 높여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정약용(丁若鏞)은 인간은 기술을 익혀서 스스로 살아가도록 되어 있는 독특한 존재라고 규정하였다. 또한 기술은 사람이 모이면 더욱 정묘해지는 것이며, 시간이 흐를수록 발전하는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는 농사하는 기술이 정교하면 경작지가 좁아도 수확이 많아지고, 투입되는 노동력은 절감되는 것이며, 일체의 생산과정에 기술이 개발되면 노력을 덜게 된다는 사실을 예증하면서, 그 시대의 기술 수준에 따라 민생과 나라의 기반이 좌우된다고 하였다.

이수광(李睟光)도 생업의 분업화를 주장하였으며, 그때의 사대부들이 농·상·공의 직종에 관여하기를 기피하는 현상을 비판하였다.

최한기(崔漢綺)는 왕조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방안을 제시하였는데, 국가의 재건은 물화(物貨)의 원활한 이용과 소통에서 비롯됨을 역설하였으며, 산업사회의 지향책을 근대적인 과학과 상업의 개발에 두었다.

또한 명분이나 추상적인 문제에 치중하는 교육보다는 생업을 위한 산업이나 기술교육을 소중한 것으로 인식하였다. 또한 실업교육·기술교육의 전문화와 분화를 역설하기도 하였다.

그 구체적 대안으로는 전래적인 농경방식의 인습을 극복해서 천하의 농업을 가르치고 지도할 농업교사[田師]를 둘 것을 제안하였다. 또 상업의 실무를 지도할 전문적 상업교사[賈師]와 공장들을 지도할 기술교사[工師], 과학적 원리를 가르칠 사사(士師)를 각각 두어야 한다고 말하였다.

실학자들은 이 밖에도 기술교육의 부진을 여러 측면에서 극복하고자 하였는데, 특히 정약용은 ≪춘추전 春秋傳≫에 정덕(正德)·이용·후생이 정치의 목적으로 명시되었음을 환기시키고, 기술 부분을 관장할 이용감(利用監)을 설치하자는 혁신적인 구상을 제안하였다.

그는 이용감을 통해 청조(淸朝)와 서구 제국의 과학기술을 도입하고자 하였다. 이러한 실학자들의 기술관의 변모에는 당시의 사회·경제적 상황 변화가 커다란 요인으로 작용하였다. 이 시기에는 조선의 중세적 체제가 점차 동요하고, 근대 지향적인 사회체제로 변화하고 있었다.

당시 사회는 그때까지의 자연경제가 무너지면서 화폐경제로 점차 이행되어 갔고, 초기적 공업의 시장화가 형성되고 있었다. 또한 자영 수공업자를 임금을 주어 고용하는 관청의 사공 임용이 차차 일반화되었고, 자영 수공업자가 임금 노동자로 전환하는 경향도 나타나고 있었다.

그 밖에 광산·수산업 분야에서도 민간 기업가가 대거 등장하여, 기술개발의 필요성을 증대시켰다. 대외적인 상황으로는, 16세기 전반부터 시작된 서양 과학기술과의 접촉이 전통적인 과학기술관의 수정을 불가피하게 하였다.

청조를 통하여 유입된 서구의 역서·천문지리서·수리서(數理書) 등은 사대부들로 하여금 중인 계층이 전담하던 과학기술 분야에까지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하였다. 그 결과 각종 기술의 보급과 교육을 위한 서적들이 간행되었다.

농학 분야에서는 홍만선(洪萬選)의 ≪산림경제≫, 서유구(徐有榘)의 ≪임원경제지≫ 등이 간행되어 각종 농법 및 기상·건축·토목 관계의 기술 보급에 이바지하였다. 의학 분야에서도 정약용의 ≪마과회통 麻科會通≫, 최한기의 ≪신기천험 身機踐驗≫ 등은 서양의 근대 의학 지식을 본격적으로 소개하였다.

또한 천문 분야에서도 홍대용(洪大容)의 ≪측량법의 測量法義≫·≪천문략 天文略≫, 남병철(南秉哲)의 ≪추보속해 推步續解≫·≪의기집설 儀器輯說≫ 등은 천문학의 전문적인 연구서로서 기술교육에 커다란 진보를 가져왔다.

개화기와 일제강점기의 기술교육

개항과 더불어 서구 열강의 한반도 진출이 본격화되자, 국력 신장을 위한 자강의 필요성이 절실히 요청되었다. 자강의 욕구는 곧 선진 서구 문물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에 정부에서는 1881년 신문화 수용을 위해 신사유람단(紳士遊覽團)을 일본에 파견하고, 그 해 9월에는 근대식 병기제조법과 기술공학을 습득할 목적으로 중국 톈진(天津)에 영선사(領選使) 일행을 파견하였다.

또 각종 외국인 기사(技師)의 고빙(雇聘:예를 갖추어 초빙하는 것)으로 근대적 기술교육의 도입과 교습이 본격화되었다. 1899년 <상공학교관제>가 마련되고, 1900년에는 광무학교(礦務學校)·우무학당(郵務學堂)·전무학당(電務學堂) 등이 설립되었으며, 외국인 교사가 초빙되어 근대 기술교육이 각 분야로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다.

한편, 1904년에 개편된 관립농상공학교가 1907년 농림학교, 사립선린상업학교, 공업전습소로 각각 개편되기도 하였다. 이 시기의 기술교육은 정부의 적극적인 권장뿐 아니라 민간교육운동 차원에서 그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1885년에 설립된 배재학당은 인문 과목 이외에 수학·기하·물리·화학·위생·생리 등 기술 과목도 함께 교수하였다. 최초의 관립학교인 육영공원(育英公院)의 경우에도 역서(譯書)·습자(習字) 등의 인문과학과 함께 산학·의학·기기(機器)·농리(農理) 등 자연과목 및 기술과학이 필수 교과목으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는 개항과 함께 서구적 학문과 그 교과목이 학교제도를 통해 본격적으로 수용되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학교제도를 통한 서구 기술과학의 습득은 여학교의 경우도 예외가 아니었다.

이화학당은 창립 초기인 1886년에는 영어만을 교육했으나, 점차 생리학·수학·과학 등 기초 기술 분야의 학과목이 추가되었다. 이후 이러한 양상은 점차 확대되어 1908년 이화학당의 교과목 구성은 오히려 자연과학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그리하여 기술교육은 체계적이고 조직적인 제도 아래 발전할 기반을 구축하였다.

그러나 일본 제국주의 침략 세력은 원료 수탈지와 상품판매 독점지로서의 식민지 경영원칙에 비추어 우리의 기술교육 진흥을 억제하였다. 또한 자체 조건의 미성숙은 기술교육의 순조로운 발전·육성에 지장을 초래하였다.

식민지 통치자들은 실학·실용교육 등을 교육의 명분으로 내세웠으나, 지극히 소수의 인원에게 하급 기술교육을 실시하는 데 한정하였다. 일제는 동화정책의 방법으로 보통학교를 확장하고, 하급 관리 및 근로자 양성을 목적으로 한 저급한 기술교육만을 한국인에게 개방하였다.

민간인이 주도하는 기술전문학교의 설립이 부진했던 이유는 일제의 직접·간접적인 통제정책의 결과였으며, 이는 우리 나라의 근대화를 지연시킨 주요한 원인이 되었다.

일제 식민지하에서도 약간의 관립 농림·상업·공업계 학교와 공업·광산 전문학교 등 기술계 교육기관이 존재하였다.

그러나 전문학교 단계는 거의 일본인 학생으로 충원되어 한국인이 전문 과학기술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정책적으로 억제, 봉쇄되었다.

기술교육의 현황 및 전망

광복 이후 기술교육의 중요성은 높이 인식되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불안정, 산업의 구조적 모순, 심각한 재정난과 제도의 미비로 본격적인 개선책이 제시되지는 못하였다.

6·25전쟁의 전시하에 문교부장관이었던 백낙준(白樂準)은 기술교육의 장려를 표방하였고, 그 구체적 실현방안으로 일인일기교육(一人一技敎育)을 제창하였다. 각자가 기술을 터득해서 전란으로 파괴된 국가 재건에 참여하고, 근로와 노작을 통해 정신 수양을 함양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기술교육의 강조는 이후 교육정책의 주요 항목이 되었다. 1950년도의 장학방침에서도 계속 과학기술을 진흥하여 생산을 증강시킴으로써 경제발전에 이바지한다는 데 중점을 두었다.

이 시기는 생활 경험을 중시하는 교육과정 개편에 주력했던 기간이었다. 기술교육 분야에서는 그때까지 초·중학교의 이과(理科)를 자연 혹은 과학으로 변경하여, 광역형 교육과정 운영방식으로 전환하였다.

제5대 장관이었던 최규남(崔奎南)과 제6대 장관이었던 최재유(崔在裕)는 과학기술교육에 큰 비중을 두고, 과학기술의 연마를 교육행정의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그러나 1950년대까지는 기술교육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회·경제적 조건의 미성숙, 정치적 불안정, 유인체제(誘引體制)의 미비 등 그 저해 요인이 중첩되어 있었다. 1960년대에 접어들면서 본격적으로 추진된 경제개발계획에 힘입어 과학 진흥·생산교육 강화·기술교육·실업교육 진흥책 등으로 기술교육이 보다 체계화되었다.

특히, 1960년대 중반 이후부터는 경제 성장에 이바지하는 교육을 최우선적인 장학 방침으로 내세웠으며, 산학협동(産學協同)의 필요성이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1963년의 <산업교육진흥법 産業敎育振興法> 제정, 1966년의 <산업기술원양성소운영규정> 공포, 1967년의 <과학기술진흥법> 공포, 1969년의 <과학교육진흥법> 제정 등은 우리 나라에서 산업과 교육의 밀접한 유대에 대한 새로운 인식을 가져왔다.

이에 과학기술교육은 1960년대의 양적 확대에서 1970년대에는 질적 향상을 맞이하는 내실화 시기로 진전되었다.

6·3·3·4제를 기간 학제로 삼고 있는 학제면에서는 후기 중등과정과 대학과정에 본격적인 기술교육 전문과정을 두고 있으며, 1963년에는 중학교 졸업자를 입학 자격으로 하고 중견 산업기술인 양성에 목적을 둔 5년제 실업고등전문학교를 창설하였다.

그 뒤 1979학년도를 기하여 기능공 양성기관의 유인체제와 질을 높이고자, 전문대학으로 명칭을 변경하여 대폭적인 확충이 추진되고 있다. 따라서 기술교육과 직결되는 학제는 커다란 변동 없이 기간 학제와 전문대학이 근간을 이루고 있다.

또한 기술학교·고등기술학교·기업체 부설 기능공양성소 등이 방계 학제로 존재하고 있으며, 앞으로는 기술교육기관이 더욱 확충되고 다양화·고도화될 것으로 예측된다.

1984년에는 <교육법>에 의거하여 평생교육 진흥의 일환으로 개방대학이 신설되었다.

개방대학은 일정한 학교교육을 마쳤거나 중단한 자로서 학술 또는 전문적인 지식 기술의 연구와 연마를 위한 교육기관으로 설치되었다. 개방대학은 1980년대 후반기에 이르러 그 명칭을 공업대학, 산업대학으로 변경하였다.

이후 1989년 우수한 과학·기술 인력 양성능력을 배양함으로써 과학문화 창달과 신기술 창출에 이바지하고자 <기초과학연구진흥법>을 제정하였고, 1997년에는 <직업교육훈련촉진법>, <한국직업능력개발원법>을 제정하여 소질과 적성에 맞는 다양한 직업교육훈련의 기회를 제공하고 직업교육훈련의 효율성과 질을 높이고자 하였다.

한편, 1997년 6월 17일에는 <기술대학 설립·운영규정>을 제정하였다. 그러나 오늘의 기술교육은 교육내용과 방법 및 교육환경 등이 여전히 그 취약성을 완전히 해결하지 못하고 있다.

기존의 기술교육체제가 사회경제적 수요를 차질 없이 충족하는 데 있어서 수급의 불균형이 커다란 문제점으로 지적되고 있다. 또한 기술교육의 내용이나 양성된 인재의 질적 수준도 산업계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는 비판도 강하다.

따라서 앞으로의 기술교육은 각급 학교의 부문별·직종별 교육내용을 개편하고, 기술 수준에 따른 수학 연한 등을 융통성 있게 조절하는 방안이 강구되어야 한다.

또한 입학요건이나 교육과정도 생산현장과 직결되는 산학협동의 내실화가 기대되고 있으며, 기술교육의 교육과정 또한 기술 창조와 변화에 대한 적응력 계발에 더욱 연계되는 방향으로 교육 목표·내용·방법 등이 재구성되어야 할 것이다.

끝으로 기술교육기관의 질적 발전을 위해서는 교육 여건에 충실하는 일 못지않게 기술 학습자의 유인동기가 뚜렷할 수 있도록 제반 관련체제의 새로운 정비가 요청되고 있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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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초기 기술관과 그 지위」(이성무,『유홍렬박사 화갑기념논총』, 1971)
관련 미디어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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