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년 4월에 조직된 대한독립단은 구 왕조에 충성을 다하려는 복벽주의노선(復辟主義路線)을 채택하고 있었기 때문에, 공화주의를 채택한 대한민국 임시정부와는 이념상 대립적인 관계를 보일 수 밖에 없었다.
이때 소장층이 복벽주의 노선에 반발하던 중, 연호 사용 문제가 발생하여 노유층(老儒層) 지도부와 대립이 더욱 첨예화되면서, 결국 노유층이 중심이 된 기원독립단과 소장층이 중심이 된 민국독립단(民國獨立團)으로 분립되었다.
기원독립단은 박장호(朴長浩)·백삼규(白三圭) 등이 지도하였으며, 총단장대변(總團長代辯) 이웅해(李雄海), 총무 부장 김평식(金平植), 재무 부장 전덕원(全德元), 검찰 부장 강규묵(康圭默), 참모 부장 김정희(金鼎熙, 일명 尙彬), 참모 백진해(白鎭海), 독립군 대장 채원개(蔡元凱)·백경수(白庚洙) 등으로 임원진이 구성되었다.
그런데 분립이 된 뒤에도 민국독립단과는 계속 협력하며, 남만주와 국내에서 진행된 군자금 모금, 일본 경찰 및 행정 기관 공격, 밀정을 포함한 친일파 처단 등의 활발한 무장 투쟁을 전개하였다.
통합된 정규군을 조직하는 데 참여하여 1920년 2월 임시정부에 인준을 요청하였다. 군제와 군법의 정비를 거쳐 1920년 7월 26일 「대한광복군참리부규정」, 「대한광복군사령부규정」, 「대한광복군영규정」을 제정하였고 8월 1일을 시행일로 삼아 공포하였다. 이로써 민국독립단·한족회(韓族會)·대한청년단연합회 등과 더불어 광복군사령부로 통합되었다. 그렇지만 계속해서 대한독립단의 이름 아래 투쟁하였다.
1910년대부터 1920년대 전반까지 해외에서 항일 무장활동을 전개함으로써, 독립운동사에서 하나의 큰 맥락을 이루는 복벽주의 노선의 무장투쟁사로 뚜렷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