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개원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일곱째 아들인 왕자.
이칭
이칭
예원(禮元)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출생지
경주
주요 관직
아찬|대아찬|대당총관|이찬|중시|상대등
관련 사건
삼국통일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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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신라 제29대 태종무열왕의 일곱째 아들인 왕자.
개설

‘예원(禮元)’이라고도 한다. 아버지는 태종무열왕이고, 어머니는 김유신(金庾信)의 누이동생인 문명왕후(文明王后)문희(文姬)이다. 형으로는 문무왕이 된 법민(法敏)을 비롯해 인문(仁問)·문왕(文王)·노차(老且)·지경(智鏡) 등이 있다.

생애와 활동사항

655년(태종무열왕 2) 맏형인 법민이 태자로 책봉되자 지경과 함께 이찬(伊飡)에 임명되었다고 하지만, 그의 관등 승진 순서에 비추어 볼 때 아찬(阿飡)의 잘못으로 보인다. 『삼국유사』태종춘추공조(太宗春秋公條)에는 “태자 법민, 각간인문·문왕·노차·지경·개원 등은 모두 문희의 소생이고, 그 밖에 서자 급간(級干)개지문(皆知文), 차득령공(車得令公), 아간(阿干)마득(馬得)과 딸 다섯이 있었다.”라고 하였다. 그런데 『삼국사기』진덕여왕 2년조에는, 김춘추가 당나라 태종에게 주청하기를 “신에게 아들이 일곱이 있으니 원컨대 성명(聖明)의 곁을 떠나지 않고 숙위하도록 하겠습니다.”라고 했다는데, 여기서 일곱이라 함은 『삼국유사』에 나오는 적출 여섯 명에 어느 아들을 더 말한 것인지 알 수 없다.

667년(문무왕 7)에 당나라 고종이 칙명으로 “지경과 개원을 장군으로 삼아 요동의 역(役)에 보내라.” 하였더니 문무왕이 곧 지경을 파진찬(波珍飡)으로 삼고 개원을 대아찬(大阿飡)으로 삼아 고구려 정벌에 출전시켰다. 이듬해인 668년 6월에는 대당총관(大幢摠管)에 임명되고, 671년 1월에는 이찬으로서 중시(中侍)에 임명되어 2년 7개월간 재임하였다.

683년(신문왕 3)에는 왕이 김흠운(金欽運)의 딸을 맞아 부인을 삼으려 하자, 이찬김문영(金文穎)과 함께 김흠운의 집에 가서 그의 딸을 부인으로 책봉하기도 하였다. 695년(효소왕 4)상대등에 임명되었는데, 706년(성덕왕 5)에 인품(仁品)이 새로 상대등에 임명될 때까지 상대등 직에 있었던 듯싶다. 또는 706년에 김개원이 죽어 상대등이 교체되었을 가능성도 있다.

그렇지만 719년에 만들어진 경주「감산사아미타여래조상기(甘山寺阿彌陀如來造像記)」나 「감산사미륵보살조상기甘山寺彌勒菩薩造像記)」에 김개원이 성덕왕과 함께 발원자인 김지성(金志誠)의 추복(追福) 대상으로 등장하고 있어, 해석에 따라서는 719년 직전이나 그 이후까지 생존했을 가능성도 있다.

참고문헌

『삼국사기(三國史記)』
『삼국유사(三國遺事)』
『신라정치사회사연구(新羅政治社會史硏究)』(이기백, 일조각, 19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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