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나주(羅州). 자는 석지(錫之), 호는 용주(龍洲)이다. 김정준(金廷儁)의 현손(玄孫)이다.
1528년(중종 23) 평안도순변사 허굉(許硡)의 군관이 되어 서북야인의 토평에 참여하였다. 1540년 의주목사가 되었으며, 이후 김해부사를 거쳐 1547년(명종 2) 사은부사(謝恩副使)가 되어 1548년(가정 27, 명종 3) 효열황후(孝烈皇后) 상사 때 진위사 이순형(李純亨)과 함께 진향사 김경석이 명나라에 다녀왔다.
1554년(명종 9) 전라도수군도절제사로 파견되어 흑산도에 숨어 있는 왜적을 토벌하였고, 그 공으로 한 계급이 올랐다. 파직 중인 1555년(명종 10)에 삼포왜란 이래 조선의 일본에 대한 세견선의 감소에 고난을 받아온 왜구들이 배 6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에 침입할 때, 이를 방어하기 위하여 이미 파직된 무신들을 서용함에 따라 전라우도방어사에 기용되었다.
강진에 진을 치고 나주 이남을 왜의 침구로부터 보호하는 등 공헌한 바가 컸으나, 같은 해 왜변이 진압되면서 아군이 대패한 영암전투 때에 지척에 있으면서 출동하지 않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아 파직되었다.
그 대간은 죄를 줄 것을 요구하는 반면, 홍문관은 오히려 공로에 대한 표창을 해야 한다는 등 공로와 죄과에 대한 논란이 계속되었으나 결말을 보지 못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