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8년(희강왕 3) 1월 상대등(上大等)으로서 실권을 장악하고 있던 김명(金明)이 희강왕을 핍박하여, 자살하게 한 뒤 민애왕으로 즉위하였다.
그해 3월 이찬(伊飡)으로서 상대등에 임명되고 있는데, 이는 민애왕의 즉위에 공을 세웠거나, 그 지지세력인 것과 관련 있는 것이다.
그런데 민애왕 정권은 이듬해인 839년 1월에 청해진대사(淸海鎭大使) 장보고(張保皐)의 군사를 이끌고 달구벌(達句伐 : 지금의 대구)까지 진격해온 김우징(金祐徵)·김양(金陽) 등의 반란군을 막지 못하고, 도리어 크게 패하여 겨우 성립 1년 만에 무너지고 말았다.
민애왕 자신도 반란군에 피살되었다. 그는 이때 민애왕 정권의 붕괴와 더불어 운명을 같이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