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안동(安東). 자는 도이(道以), 호는 일청(一靑). 김양겸(金養謙)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김범행(金範行)이고, 아버지는 군수 김이현(金履鉉)이며, 어머니는 송재화(宋載和)의 딸이다.
1789년(정조 13) 진사시에 합격하여 영릉참봉이 되고, 이듬해 증광 문과에 병과로 급제, 초계문신(抄啓文臣)으로 뽑혔다. 1801년(순조 1) 전라도관찰사, 1803년 이조판서와 병조판서를 역임하였다. 이듬해 전직 군수·현감과 유생 등이 순조와 정순왕후(貞純王后)의 총애를 받던 좌의정 서용보(徐龍輔)를 제거하고자 소를 올리고 통문을 발하였다.
이에 서용보는 김달순도 관계되었다고 하여 인책하려 하였으나 왕이 허락하지 않았다. 그러나 인책 도중 순조의 동가(動駕) 때에 불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되었다가 다시 복직되어 이조판서에 임명되었다. 1805년 홍문관제학을 거쳐 전 호조판서 이서구(李書九)가 죄를 쓰고 물러감에 따라 호조판서가 되었다.
그러나 이서구의 잘못을 밝히지 않고 비호하였다는 죄목으로 유배를 당한 뒤 그 해 특지로 우의정이 되었다. 그 뒤 『정조실록(正祖實錄)』을 바치고 『선조보감(先祖寶鑑)』의 편찬을 청하였다.
벽파(僻派)였던 김달순은 박치원(朴致遠) 등을 추증(追贈)하라고 아뢰었다가, 1806년 형조참판 조득영(趙得永) 등 시파(時派)로부터 정조의 유지에 위배된다는 공격을 받고, 홍주목을 거쳐 남해안에 안치되었다가 다시 강진현에 이배되어 사사되었다. 뒤에 다시 신원되었다. 시호는 익헌(翼憲)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