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서기』에 의하면 689년(신문왕 9) 4월에 “신라가 김도나 등을 보내어 영진인왕(瀛眞人王)의 죽음을 조문하고, 아울러 학문승(學問僧) 명총(明聰)과 관지(觀知) 등을 보내어 별도로 금동아미타상·금동관세음보살상·대세지보살상 각 1구와 채백금릉(綵帛錦綾)을 바쳤다.”고 한다.
그리고 같은 해 5월 22일에 일본조정에서는 “신라의 봉칙사자(奉勅使者)는 원래 소판(蘇判)의 관위(官位)에 있는 사람을 보내도록 되어 있는데 지난번 텐지왕(天智王)의 조상사(吊喪使)로는 일길찬(一吉飡) 김살유(金薩儒) 등을 보내더니 이번에는 급찬(級飡)으로 조위사를 삼으니 이는 전례에 어긋난다.
마땅히 진상한 예물과 별도로 보낸 불상과 채백금릉 등을 모두 돌려보낼 것이나 차마 그렇게 할 수 없으니 돌아가거든 그대 임금에게 앞으로는 전례를 지키도록 하라고 아뢰어라.”고 부탁하였다.
6월 20일에는 일본왕이 쓰쿠시대재(筑紫大宰)에게 명하여 신라 학승에게는 면(綿) 각 140근을 선물하고 23일에는 송별연을 베풀고 선물을 각기 차등 있게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