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7년 경상북도 대구에서 출생했다. 필명은 화돈(花豚)으로, 일본 와세다중학과 마쓰야마고등학교[松山高等學校]를 거쳐 도쿄제국대학 문과를 중퇴했다. 1939년에는 조선문인협회 간사를 지냈으며,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총재부 촉탁을 역임하다가 1941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귀화했다. 그의 비평활동은 1936년 『동아일보』에 「전통(傳統)과 기교문제(技巧問題)」(1.16.∼1.24.), 같은 해 『조선문학』에 「문학비예술론자(文學非藝術論者)의 독백」(1936.5.) 등을 발표하면서 본격적으로 전개되었다. 그는 당시 『조선일보』에 비평론을 발표하던 이원조(李源朝)·최재서(崔載瑞) 등과 문학적 견해를 달리하는 평론을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논쟁적인 글을 썼다. 그의 비평경향은 심미적이며 언어예술의 미적 형상성(形象性)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었다. 김유정(金裕貞)의 작품세계를 평가하는 글에서 이러한 경향이 잘 나타나 있는데, 그는 거기서 “전통적인 우리말 어휘의 풍부함과 언어구사의 묘미가 중견의 대가들보다도 뛰어나다”고 지적하고 있다.
1937년 『동아일보』에 발표한 「비평예술론」(12.7.∼12.12.)에서는 “가치의 창조가 작가의 생명이라면 가치의 재창조는 비평의 혈혼(血魂)이다”라고 하면서 비평이 지니는 창조적 측면을 강조했다. 비평집으로 『비평문학(批評文學)』(1938), 창작집으로 『아리랑고개』(1938) 등이 있다. 1939년부터 친일협력 행위를 시작했으며, 다수의 친일 관련 글을 남겼다.
김문집의 이상과 같은 활동은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 제2조 제11·13호에 해당하는 친일반민족행위로 규정되어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 보고서』 Ⅳ-2: 친일반민족행위자 결정이유서(pp.524∼556)에 관련 행적이 상세하게 채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