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광산(光山). 호는 묵헌(默軒). 의사(義士) 김익겸(金益兼)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광성부원군(光成府院君) 김만기(金萬基)이고, 아버지는 판의금부사(判義禁府事) 김진구(金鎭龜)이며, 어머니는 이광직(李光稷)의 딸이다. 인경왕후(仁敬王后)의 조카이다.
1721년(경종 1) 영의정 김창집(金昌集) 등 노론 4대신이 경종의 건강이 나쁘고 세자도 없어 세제(世弟) 책봉을 논의하자, 김복택은 서덕수(徐德修)를 통하여 당시 잠저(潛邸: 임금이 되기 전에 거쳐하던 집 또는 왕자로 지낸 시기)에 있던 연잉군(延礽君: 뒤의 영조)에게 이 말을 전하였다.
김창집 등의 주장으로 연잉군이 왕세제로 책봉되어 정무를 대리하므로, 책봉에 반대하던 소론 승지 김일경(金一鏡)·목호룡(睦虎龍) 등은 노론 4대신을 무고하여 신임사화를 일으켰다. 이때 김복택도 이에 연루되어 거제도에 유배되었다. 1724년 유배에서 풀려난 뒤 영휘전참봉(永徽殿參奉)에 임명되었다.
그러나 신임사화 때 노론파의 대다수가 죽었는데도 유배만 당하였던 사실과 신임사화를 비난한 것이 영조의 비위에 거슬려 1740년 투옥되어 옥사하였다. 그 뒤 영조는 자신의 지나친 조처를 후회하였다. 1779년(정조 3) 신임사화 때 죽은 노론파 대신을 증시(贈諡)하면서 김복택도 관품이 추능되고 자손은 등용하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