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명 김선렬(金先烈). 경상남도 밀양 출신.
1919년 밀양에서 3·1운동을 주도한 뒤 중국으로 망명하였다. 1926년 중국 광둥[廣東]의 황푸군사정치학교 보병과에 입학하였고, 의열단(義烈團)에 입단하였다.
1928년 상해에서 남화한인청년연맹(南華韓人靑年聯盟)을 조직하고 기관지 『남화통신』을 발간하였으며, 1930년 김좌진(金佐鎭) 등과 한족총연합회를 조직하였다.
1932년 일본의 상해침공 때는 중국 제19로군에 입대, 일본군에 항전하였고, 같은 해 7월 이회영(李會榮)이 일본경찰에 잡히자, 밀고자를 처형하였다.
1933년 3월 백정기(白貞基) 등과 모의하여 주중일본공사 아리요시[有吉明]를 폭살하려던 6·3의거에 관련되었고, 같은 해 5월 오면직(吳冕稙) · 엄형순(嚴亨淳) · 안경근(安敬根) 등과 같이 일본영사관 밀정 이종홍을 교살, 처단하는 등 친일분자를 숙청하다 잡혔다.
1938년 해주지방법원에서 징역 18년형을 받아 복역하다가 1945년 광복을 맞아 출옥하였다.
1977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