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현(安城縣) 출신. 아버지는 상서좌복야 김돈(金㻻)이며, 판전교시사(判典校寺事) 김우일(金于鎰)의 아버지이다.
15세에 과거에 급제하였고, 덕원부서기(德原府書記)를 거쳐 동문원녹사(同文院錄事)를 역임하였다. 1273년(원종 14)에 원나라의 세조가 일본을 선무하고자 비서감(秘書監) 조양필(趙良弼)을 파견할 때 서장관으로 일본에 가서 일본을 설복시키고 귀국하여 그 공으로 감찰어사(監察御史)가 되었다.
1292년 원나라에서 홍군상(洪君祥)을 우리나라에 파견하여, 앞서 우리나라에서 포로로 잡고 있던 일본인을 돌려보낼 것과 아울러 일본을 설복시켜 원나라에 복속하도록 할 것을 종용해오자, 다시 선위사(宣慰使)가 되어 서장관 곽린(郭麟)과 함께 호송과 설복의 임무를 띠고 일본에 건너갔다가 억류되어 돌아오지 못하였다.
그 뒤 조정에서는 김유성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김유성의 집에 세록(世祿: 대대로 이어받는 국록)을 주었으며, 김유성에게는 첨의평리(僉議評理)의 직첩을 내려주었다. 그 뒤로 김유성의 생사를 몰랐으나 일본의 중 겡코(鉗公)에 의하여 가마쿠라[鎌倉]에서 병사한 것으로 알려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