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로 11㎝, 가로 7㎝. 71면 필사본. 이 일기는 1895년 11월 16일 이천 의병의 조직부터 1896년 6월 자결·순국할 때까지의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내용은 을미사변 뒤 1895년 11월 서울을 떠나 이천에서 의병을 조직하는 과정부터 시작된다. 본진은 이천의 이현(梨峴)에 두고, 이천군(김하락 담당), 광주(趙成學 담당), 양근과 지평(具然英 담당), 안성(金泰元 담당), 음죽(申龍熙 담당) 등지에서 모병하였다.
모병의 주된 대상은 각군 소속 포군들로서 이천에서 100여 명, 광주에서 300여 명, 양근과 지평에서 300여 명, 음죽과 죽산에서 300여 명이었다. 먼저 포군대장을 만나 명부를 열람하고 개별적으로 응모를 종용했으며, 자원자 100여 명도 있었다고 한다.
안성에서는 별도로 민승천(閔承天)이 의병을 일으켰기 때문에 안성 의병과 합병하기로 약속하였다. 이 때에는 창의(倡義)하는 사람이 각처에서 벌떼처럼 일어났다. 용인·안성·포천·시흥·수원·안산 등지에서 일어난 의병은 일제히 이천 수창의소(守倡義所)로 집결하였다.
그 조직을 살펴보면, 창의대장에 민승천, 도지휘에 김하락, 군문도총(軍門都摠)에 조성학, 좌군에 김귀성(金貴星), 우군에 신용희, 선봉에 김태원, 중군에 구연영, 후군에 박준영(朴準英), 도모에 전귀석(全貴錫), 유격에 김경성(金敬誠), 돌격에 심종만(沈鍾萬) 등이다.
삼기구대(三騎九隊)의 진법에 따라 1기를 3대로 나누고, 대에는 각각 십장(什長)을 두어 대오를 편성하였다. 이리하여 12월 4일에 제1차 이천 전투, 29일에 제2차 이천 전투를 치렀다. 제2차 전투에서 이현의 본부 건물이 소각당해 1896년 1월 30일 광주산성(廣州山城)으로 진을 옮겼다.
광주산성이란 남한산성으로서, 성 안에는 식량과 식염이 수백 석이나 쌓여 있었다. 또한 대완기(大碗器)·불랑기(拂狼器)·천황포(天黃砲)·지자포(地字砲)·천보총(千步銃)·조총(鳥銃), 그리고 탄약과 철환 등도 산더미같이 쌓여 있었다.
광주산성 전투는 김하락이 도지휘를 맡아 그 해 2월 4일부터 시작되어 21일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좌익장 김귀성, 후군장 박준영의 배반으로 밤에 성문이 열려 일본군과 관군이 들어옴으로써 성은 함락되고 말았다.
김하락은 굴하지 않고 고향인 영남으로 이동하여 의병 항쟁을 계속하기로 하고, 제천·단양·풍기·영천·안동을 거쳐 의성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4월의 의성 전투로 이천 의병이 강하다는 소문이 영남 일대에 퍼졌으나, 전세가 불리해지자 경기도 출신 의병들이 먼저 귀향해 한때 30명밖에 남지 않았다.
그러나 김하락이 이끄는 의병은 다시 병세를 강화하여 5월 7일 드디어 경주를 포위, 공격하였다. 이때 복수기(復讐旗)를 앞세워 대의를 천명하였다. 12일까지 일시 경주를 점령하였지만, 결국 패전하여 흥해와 영덕으로 진을 옮기었다.
김하락은 6월 4일의 영덕전투에서 장렬하게 최후를 마쳤다. 두 발의 탄환이 그의 좌우어깨를 관통하자, 그는 “우리 500년 예의의 나라가 개나 양 같은 섬나라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인가, 수천만 우리 민족이 과연 참혹한 희생물이 안 될 수 없단 말인가, 차라리 물에 빠져 죽을지언정 살아서 왜적에게 욕은 당하지 않으리라.” 하면서 강물에 몸을 던졌다고 한다. 이때 김하락을 따라 순국한 의병도 많았다고 전해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