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국사기』등의 문헌 기록에는 나오지 않는 관직이나 경주의 「남산신성비(南山新城碑)」와 「명활산성작성비(明活山城作城碑)」에서 찾아볼 수 있다.
591년(진평왕 13)에 건립된 「남산신성비」는 지금까지 모두 9기가 알려져 있는데, 그 가운데 제1비의 내용을 보면 “아량 나두 사탁 음내고 대사(阿良邏頭沙啄音乃古大舍)”로 되어 있다. 기존에는 일본인 학자들의 주장에 따라 아량라(阿良邏)를 군명(郡名)으로, 두(頭)를 군두(郡頭)로 해석해 왔었다. 그러나 1980년대 이후에는 촌명(村名), 관직명, 출신부명, 인명, 관등(官等) 순으로 해석하여 나두(邏頭)를 관직명으로 보는 데 견해를 같이하고 있다. 그리고 「명활산성작성비」에는 ‘상인나두(上人邏頭)’라는 관직이 기록되어 있다.
나두가 어떠한 역할을 담당했던 관직이었는지는 자료의 부족으로 확언할 수 없다. 그러나 「남산신성비」에 보이는 나두의 관등이 도사(道使)의 관등과 같은 대사(大舍)인 점을 보아서 당주(幢主)가 파견된 군(郡)의 도사 또는 군태수(郡太守)로 추정된다. 그리고 혹자는 당주의 후신으로 파견된 지방관으로 추측하기도 한다. 즉, 나두와 도사는 정치적인 비중은 같았으면서 파견된 곳 즉 당주의 존재 유무에 따라 그 명칭이 달라졌을 것으로 보는 것이다. 이러한 해석과는 다르게, 라(邏)라는 글자가 ‘순라(巡邏)’ 즉 경찰관계 업무에 중점을 둔 의미로 보고, 나두는 나병(邏兵)들의 지휘관이라고 보는 견해도 있다. 한편 군의 장관인 당주를 군사적 측면에서 보좌한 지방관은 나두였고, 행정적 측면에서 행정촌의 일반 업무를 담당했던 지방관은 도사였다는 주장도 있다.
그런데 신라 중고기의 지방관, 특히 「남산신성비」에 나두와 함께 기록되어 있는 당주와 도사 등이 고구려의 관직에서 채용된 것이기 때문에 나두도 고구려 소성(小城)의 장관인 가라달(可邏達)과 관계가 있다고 보기도 한다.
어쨌든 나두의 관등이 경위(京位) 제12관등인 대사이기 때문에 4두품 이상의 왕경인(王京人)이 가질 수 있던 신라의 지방관이었음은 틀림없는 사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