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함열(咸悅). 자는 숙부(淑夫). 할아버지는 남순(南順)이고, 아버지는 강원도관찰사 남찬(南璨)이며, 어머니는 신자승(申自繩)의 딸이다.
1533년(중종 28) 별시 문과에 병과로 급제, 승문원박사에 보임되었다가 승문원도제조가 무단으로 보임시켰다는 대간의 논란을 받고 승문원에서 나와야만 하였다.
1536년 홍문관부정자에 제수되고, 이후 지평을 역임하였다. 1544년 안산군수(安山郡守)로 재직 중 청렴근면하고 백성들에게 선정을 베풀었다는 경기도관찰사 홍섬(洪暹)의 장계에 따라 가자되었다. 1547년(명종 2) 승정원좌부승지로 발탁되고, 같은 해 진위사로 임명되었다가 신병으로 교체되었으며, 곧 상호군에 제수되었다.
1548년 황해도관찰사, 이듬해 해주교생(海州校生) 안세복(安世福) 등이 선정을 베풀었으니 계속 근무하게 해달라는 상소를 올려 한 계(階)가 가자되면서 유임하도록 되었다. 그러나 유생의 상소가 실정과는 다르다는 것이 판명되면서 가자가 취소되고 상호군에 좌천되었다가 같은 해 전라도관찰사로 임명되었다.
1551년 한성부우윤을 거쳐 함경도관찰사가 되었는데, 이 때 탐학이 심하다는 대간의 탄핵을 받고 다시 동지중추부사에 좌천되었다. 자질이 용렬하고 고집이 세고 학식이 얕아 명리를 탐취하였지만, 직무에는 근면하여 세인으로부터는 능력있는 관리라고 인식되었다. 특히 활쏘기에 능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