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전개된 민족유일당운동은 기존단체를 본위로 하자는 협의회파와 기존단체를 인정하지 않고 새롭게 당을 조직하자는 촉진회파로 분열되어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재중국한인청년동맹이 신민부군정파, 즉 책진회[촉진회]와 노선을 같이하자 남만청년연맹은 길성(吉城)·만흥(萬興)·백산(白山)·여신(勵新) 등 6개 청년동맹과 연합해 1929년 2월 협의회의 노선을 지지하는 남만한인청년총동맹을 발기하였다.
집행위원장에 고이허(高而虛), 중앙집행위원에 최봉(崔鳳)·고원(高元)·이을(李乙) 등 17명을 선출하였다. 그리고 강령으로 남만주에 산재한 각 계층의 혁명청년대중의 역량을 총집중하고, 청년대중을 철저한 정치적 교양과 군사적 훈련으로 민족해방운동의 전위투사로 양성할 것, 세계피압박청년대중운동과 공동전선을 결성할 것을 채택하였다.
당면 투쟁과업으로는 조선노동자의 동맹파업과 농민의 소작쟁의를 정신적·물질적으로 원조하고 절대 비타협적인 정치투쟁을 전개해 만주청년운동의 근본적 의의로서 군사적 임무를 수행할 것, 중국에서의 항일운동에 직접 참가해 일본의 만주·몽고침략정책에 반대할 것을 결의하였다.
그러나 이 단체는 사회주의운동을 표방한 점에서 재중국한인청년동맹과 같은 성격이었다. 따라서 전술전략상 표면적으로는 정의부의 협의회파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으나, 내면적으로는 사회주의운동을 지향하던 촉진회파와 밀접하였다.
특히 중앙집행위원이었던 최봉·고원 등은 재중국한인총동맹 엠엘파(ML派)와 내통하면서 정의부의 파괴를 도모하였다. 이 때문에 이 단체와 정의부 간에는 암투가 계속되었다. 정의부가 국민부(國民府)로 개편된 뒤, 국민부 간부 김문학(金文學)·김보안(金輔安) 등은 이 단체의 최봉·이태희(李泰熙)·지운산(池雲山)·이광선(李光先)·한의철(韓義哲)·이몽렬(李夢列) 등 6명을 1929년 9월 16일 신빈현 북왕청(新賓縣北汪淸) 부근 산골짜기에서 총살하였다.
이에 대해 이 단체에서는 길림동맹(吉林同盟) 집행부 명의로 ‘필사적 파시스트단인 살인강도 국민부에서 흥경 일대(興京一帶) 전위투사 대학살’이라는 인쇄물을 그 해 11월 10일 각지에 배포해 반국민부 기세를 고조시켰다. 그 뒤 이 단체의 활동 및 해체과정에 대해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민족유일당운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