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의령(宜寧). 초명은 남이경(南以敬), 자는 자안(子安), 호는 설사(雪蓑). 할아버지는 이조참판 남응운(南應雲)이고, 아버지는 남호(南琥), 어머니는 신사헌(愼思獻)의 딸이다. 참판 남이신(南以信)의 아우이다.
1590년(선조 23) 증광 문과에 장원급제한 뒤 1593년 세자시강원사서(世子侍講院司書)가 되고, 이듬해 평안도 암행어사를 거쳐 사헌부지평·사간원정언·홍문관교리 등을 역임했다.
1597년 정유재란 때 체찰사(體察使) 이원익(李元翼)의 종사관이 되었으며, 이어서 이조좌랑·정랑을 거쳤다. 1598년 이발(李潑)·정인홍(鄭仁弘) 등과 북인(北人)의 우두머리로 영의정 유성룡(柳成龍)이 왜와 화의를 주장했다고 해 탄핵, 파직시켰다.
뒤에 집권에 성공한 북인은 대북(大北)·소북(小北)으로 분열되었다. 이때 유영경(柳永慶)과 함께 소북을 영도했으나 다시 남당(南黨: 淸小北)과 유당(柳黨: 濁小北)으로 나뉘었다. 선조 말년 소북과 대북 사이에 왕위계승 문제로 치열한 싸움 끝에 대북이 지지하던 광해군이 즉위함에 따라 유영경과 함께 파직당했다가 다시 기용되었다.
1609년(광해군 1) 형조참의·대사간·이조참의·예조참의를 거쳐 이듬해 홍문관부제학, 1613년 호조참판·도승지·예조참판이 되었고, 이듬해에는 병조참판이 되었다.
1615년 이원익과 더불어 폐모론(廢母論)을 반대하다 파직되어 평산(平山)·해주(海州)·송화(松禾) 등지에서 유배 생활을 하다가 1621년 풀려나와 전감군접반사(田監軍接伴使)에 이어 체찰사 이경전(李慶全)의 부사(副使)가 되었으나 1623년 인조반정으로 다시 파직당했다.
1624년 관향사(管餉使)로 기용되었으며, 이어서 대사간·대사헌·함경도관찰사를 거쳐 1627년 가도(椵島)에 주둔한 명장(明將) 모문룡(毛文龍)의 접반사가 되었다. 이 때 용전(用錢)의 편리함을 깨닫고 주전(鑄錢)을 건의하였다. 1637년 절친한 사이인 좌의정 최명길(崔鳴吉)의 천거로 이조판서에 올랐고, 이듬해 동지경연사(同知經筵事)를 겸했다.
1639년 다시 대사헌을 거쳐 공조판서가 되었으나, 앞서 청나라에 인질로 보낸 왕제(王弟)와 대신을 다른 사람으로 바꾸어 보낸 사건으로 파직되었다가 1640년 죽음과 함께 복직되었다. 권모술수에 능하고 담론을 좋아했다. 저서로는 『설사집(雪蓑集)』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