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황의 학문과 연관이 깊은 인물들을 중심으로 형성되었으며, 주로 경상북도 지역과 서울·경기 지역을 중심으로 거주하며 활동했다. 영남 지역의 남인을 영남(嶺南),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을 경남(京南) 혹은 근기남인(近畿南人)이라 한다. 17세기 중·후반, 북인(北人)과 인연이 깊으면서도 남인으로 활동하는 인물들이 나타나 활동했는데, 이들을 북인계 남인라고도 부른다.
남인은 현종대 예송(禮訟)을 거친 후 숙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잡았다. 이후 1680년(숙종 6)의 경신환국(庚申換局: 庚申大黜陟)으로 정권을 잃었으며 이때 윤휴(尹鑴)·허적(許積)·이하진(李夏鎭)·이원정(李元禎) 등 많은 사람들이 죽음을 당하거나 유배되는 시련을 겪었다. 1689년(숙종 15)의 기사환국(己巳換局)으로 다시 정권을 장악했다가 1694년(숙종 20)의 갑술환국(甲戌換局)으로 권력을 잃었다. 남인들은 이후 영조대 초반, 탕평정치(蕩平政治)가 본격화되는 상황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오광운(吳光運)이 대표적이다. 정조대 남인들의 정치적 활동은 채제공(蔡濟恭)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남인의 학문은 대체로 이황의 학설에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영남 지역의 남인과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 간에는 그 경향에서 많은 차이를 보이기도 했다. 영남 지역의 남인들은 이황의 학설을 계승 발전시키는 방향, 곧 주자학의 틀 속에서 학문의 방향을 설정하고 있었다면, 유형원이나 이익·정약용에게서 볼 수 있듯이,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들은 다양한 학술·사상에 관심을 기울이고 또 적극적인 국가개혁론도 구상하였다.
남인은 본래 동인에 속해 있었으나, 동인 내부의 서경덕·조식계 인물들과 의견 충돌을 일으키면서 독자적인 당파를 이루었다. 서경덕·조식계 인물들은 북인이 되었다. 동인이 남인과 북인으로 분화한 시점은 대략 1587년(선조 20)을 전후한 시기이다. 분당의 주요 요인 가운데 하나는 서인(西人)에 대한 대처 방식과 연관이 있었는데, 남인들은 서인과 동인 가릴 것 없이 피차 고르게 등용하자는 입장을 견지했다. 이에 반해 북인은 서인을 공격적으로 배척했다. 이때 남인의 중심을 이루었던 인물은 유성룡(柳成龍)·우성전(禹性傳)·김성일(金誠一) 등이었으며, 북인은 허봉(許篈)·이발(李潑)·이산해(李山海)·정인홍(鄭仁弘) 등이었다.
동인이 남북 양당으로 분화한 것은 그 원인이 다양하게 거론된다. 이를테면, 당시의 당론서(黨論書) 등에서는 서인 정철(鄭澈)의 세자 책봉을 둘러싸고 일어난 문제를 대응하는 과정에서 일어난 이발과 우성전과의 대립, 정철에 대한 강경한 처벌을 요구하는 이산해와 그 처벌에 미온적이었던 우성전의 대립, 그리고 전랑(銓郎) 천거문제를 에워싼 이산해와 유성룡과의 알력, 이발과 우성전과의 사이에 평양기생 문제를 계기로 발생한 사감 등을 들고 있다.
그러나 대체로 이황에게 직접 배웠거나 아니면 그의 영향을 크게 받은 인물들은 남인으로 활동했다. 반면 북인에 속한 인물들은 서경덕·조식의 학맥과 연결되는 경우가 많았다. 서로 사는 지역이 달랐고, 주자학에 대한 태도를 비롯한 학문 성향에서 차이가 나타났으며, 현실인식이 일치하지 않았던 까닭에 분당하게 되었던 것이다. 한편, 초기 남인 가운데에는 이황과 조식에게 직접 배운 인물들도 많이 있었다.
남인이 북인과 분리되며 그 정치색을 확실히 드러내는 계기가 된 사건으로 1589년(선조 22)에 일어난 기축옥사(己丑獄事)를 들 수 있다. 기축옥사는 정여립(鄭汝立)의 역모사건으로 인해 일어났는데, 사건의 처리를 주도했던 인물은 서인이었던 정철(鄭澈)이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기축옥사에 연루되어 처벌 받거나 정치적으로 피해를 입었다. 이발·이길(李洁)·최영경(崔永慶)·정개청(鄭介淸)·홍가신(洪可臣)·한백겸(韓百謙)·백유양(白惟讓)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대부분 정여립과 인연이 있다는 연유로 처벌되는데, 이 과정에서 남인의 영수였던 유성룡은 정철이 주도하는 사건처리에서 연루자들을 적극적으로 옹호하고 구해주지 않았다는 이유로 북인들로부터 거센 비판을 받게 되었다. 이후 남인과 북인은 그 당색을 확실히 하였다.
인조반정(仁祖反正) 이후, 북인 정권이 몰락하면서 남인들의 정계 진출 또한 활발해졌다. 이때의 남인으로는 유성룡의 문인 정경세(鄭經世)를 비롯, 이원익(李元翼), 선조·광해군 이래 남인의 일원이었던 이광정(李光庭)·이성구(李聖求)·이준(李埈)·장현광(張顯光) 등을 들 수 있다.
남인들이 그 세력을 키우고 정치력을 발휘하는 것은 현종대 이후였다. 이들은 두 차례의 복제(服制) 논쟁, 곧 1659년(현종 즉위년)의 기해예송(己亥禮訟), 1673년(현종 14) 갑인예송(甲寅禮訟)을 거치며 서인과는 명백히 구별되는 견해를 제기했으며, 결국 그 연장선 상에서 숙종이 즉위하자 정권을 장악하였다. 특히 문제가 되었던 것은 기해예송이었다. 자의대비(慈懿大妃)가 효종에 대해 입어야 할 복제에 대해 서인들은 기년복(朞年服)을 주장했고, 남인들은 3년복을 주장하였다. 서인들이 기년복을 주장한 근거는 효종이 자의대비에 대해 차자(次子)라는 점이었다. 남인들의 주장은 자의대비가 장자에 대한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허목의 입장과 신하의 입장에서 상복을 입어야 한다는 윤휴의 입장으로 양분되기도 했다. 하지만 남인들은 이 논쟁을 계기로 서인을 압도할 수 있는 입지를 다질 수 있었다.
한편, 이 시기 남인으로 활동했던 주요 인물인 허목(許穆)과 윤휴·이하진 등은 광해군대의 북인과 연결된다. 이들의 할아버지 혹은 아버지는 대북(大北) 혹은 소북(小北)이었는데, 인조반정 이후 북인들이 힘을 잃으면서 그 후손들은 남인이 되었다. 북인계 남인의 등장이었다. 관직 생활을 하지 않았지만, 유형원도 이 범주에 속한다. 이들 북인계 남인들은 남인과 북인의 학문적 특성을 고루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평가되는데, 경세학에 대한 관심이 매우 큰 것은 그 한 특징이 된다.
갑인예송은 인선왕후(仁宣王后: 효종비)가 세상을 떠난 이후 일어났다. 서인들은 차자부(次子婦)의 입장에서 대공복(大功服: 9개월)을, 남인들은 장자부(長子婦)의 입장에서 기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때, 현종이 남인의 주장을 채택함으로써 서인들은 큰 타격을 입게 되었고, 결국 숙종 즉위 후 남인들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숙종 초의 남인은 탁남(濁南)과 청남(淸南)으로 분화하였다. 서인 처벌에 대한 태도, 정국 운영의 방식을 둘러싸고 일어난 갈등이 원인이었는데, 탁남에는 허적을 비롯, 민암(閔黯)·민희(閔熙)·오시수(吳始壽)·목창명(睦昌明)·유명천(柳命天) 등이 속했다. 민암은 이후 폐비 문제로 사사(賜死)되었으며, 민희·오시수·목창명·유명천 등은 경신환국 때 사사당하거나 유배되었다. 청남은 서인의 죄를 강력하게 추궁해 문죄할 것을 주장했는데, 허목을 비롯, 윤휴·홍우원(洪宇遠)·권대운(權大運), 대사헌을 지낸 이봉징(李鳳徵), 경기감사를 역임한 이옥(李沃), 허견사건(許堅事件)에 연루된 오정위(吳挺緯) 등이 이에 속한다.
이 시기, 서인과 첨예하게 대립하며 정국을 이끌었던 남인은 1680년(숙종 6), 허적의 아들 허견의 역모 사건으로 권력을 잃었다(庚申換局). 이때 허적·윤휴·이원정·이하진 등 많은 사람들이 죽거나 유배되었다. 이 사건 이후로, 당파간의 정권 교체, 정국 변동은 매우 격렬하게 진행되는데, 남인들은 1689년(숙종 15)에 권력을 차지했다가(己巳換局) 1694년에 서인들에게 권력을 잃었다(甲戌換局). 기사환국 후 권력을 장악한 남인의 주요한 인물로는 민암·권대운·김덕원(金德遠)·이담명(李聃命) 등을 들 수 있다. 이 무렵, 활동한 영남 출신의 주요 인물로는 이현일(李玄逸)을 꼽을 수 있다. 그를 대표하는 활동은 무엇보다 이이의 성리설을 비판하고 이황의 학설을 옹호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펼친 점이다.
갑술환국 후 남인의 정권 참여는 대단히 어렵게 되었다. 그런 와중에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들은 18세기 초 문외파(門外派), 문내파(門內派), 과성파(跨城派)로 3분되었다. 문외파는 남인 중의 별파라는 의미인데, 심단(沈檀)·권이진(權以鎭)·이인복(李仁復)·이중환(李重煥)·오광운(吳光運)·강박(姜樸) 등이 주축이 되었다. 이들은 경신환국 때의 남인, 기사환국 후의 남인들과는 거리를 두려고 하였다. 허목의 정치적 입장을 계승하는 한편으로 허적·윤휴의 정치적 신원에 대해서는 비판적이었다. 문내파는 기사환국 후 남인의 지도자인 권대운·김덕원의 손자인 권중경(權重經), 김화윤(金華潤) 등으로 문외파의 의견과 행동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이들은 1728년에 일어났던 이인좌의 반란에 적극 가담했다가 완전히 몰락했다.
한편, 이 시기 영남 지역의 남인들은 중앙 정계로 진출이 그다지 활발하지 않았다. 반면 이들은 향촌사회의 구심을 이루고 이황의 학문을 계승하며 그 문제의식을 확장해 나갔다. 이때 활동했던 주요 인물로는 이재(李裁)·김성탁(金聖鐸)·이상정(李象靖)·이광정(李光靖) 등이다. 19세기 영남지역 남인의 학문은 이진상(李震相)에게로 이어졌다.
영조대 들어 탕평정치가 펼쳐지는 가운데 정계에 진출한 남인은 오광운·권이진 등의 청남계였다. 특히 이 시기 중요한 역할을 했던 인물은 오광운으로, 그는 영조의 탕평책에 적극 동조하였다. 또한 적지 않은 남인들이 정계에 진출하게 되는데, 채제공이 그 중심에서 남인들을 이끌었다. 이때의 주요 인물로는 이헌경(李獻慶)·정범조(丁範祖)·이익운(李益運) 등이 있다.
정조대 남인들의 활동은 정조의 탕평 노력, 체재공의 적극적 활동 등에 힘입어 활기를 띠었다. 이가환·정약용과 같은 인물들은 정조의 깊은 신임을 받았다. 이들은 신해통공(辛亥通共) 정책, 화성(華城) 건설, 사도세자 신원 등을 주도하면서 정조가 추진한 탕평정치의 일각을 뒷받침했다. 한편, 정조대 남인들 가운데는 천주교에 관심을 기울이는 사람들이 많이 나왔는데, 윤지충·권상연 등이 부모의 신주를 불태운 진산(珍山) 사건 이후, 내부 분열을 일으켜 천주교를 믿지 않는 사람들이 믿는 사람들을 공격하기도 하였다.
18세기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들은 학문적으로도 17세기 남인들의 영향을 받으며 다양한 변화를 보였다. 이익은 안산을 근거지로 많은 제자를 길러 ‘성호학파(星湖學派)’로 이름 붙일 수 있는 학단을 형성했다. 이들은 중앙 정계와는 인연이 그다지 깊지 않았다. 권철신(權哲身)·안정복(安鼎福)과 같은 인물들이 그의 학문을 계승했으며, 정약용 또한 이익의 학문에 깊은 영향을 받았다. 이들은 당대 조선 사회를 크게 변화시킬 수 있는 사상을 발전시켰다. 앞선 시기의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으로 서양의 학문과 사상을 적극 소화하고자 했던 노력이 이와 같이 귀결되었던 것이데, 이들은 17세기 북인계 남인들이 싹틔웠던 국가개혁의 논리를 정밀히 다듬고, 주자학적 사유와는 다른 견지에서 경서를 재해석하고자 하였다. 나아가, 서양의 과학 기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일 것을 강조하기도 하였다.
16세기 말, 붕당정치가 본격화되면서 등장한 남인은 이후 조선 역사의 한 축을 담당한 중요한 정치세력이었다. 영남과 서울·경기가 이들의 지역 기반이었으며, 이황의 학문은 그 학술 근거였다. 이들이 중앙의 권력을 장악한 시간은 그다지 길지 않았다. 그러나 이들은 정치적으로나 학술적인 면에서 그들만의 개성을 가진 업적을 매우 풍부하게 남겼다. 영남지역의 남인들의 경우, 이황의 학술을 심화시키는 차원에서 주로 활동했으므로 성리학의 틀을 쉽게 벗어나지 않았으나, 서울·경기 지역의 남인들, 특히 북인계와 연결되는 남인들은 당대 조선의 학술계를 변화시키고 나아가 조선의 국가질서 자체를 바꿀 수 있는 논리들을 적극적으로 개척하였다. 이 시기 대두한 새로운 학풍인 실학(實學)의 주요 담당자가 이들 남인들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