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치근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전기에 전라도병마절도사 · 전라도순변사 ·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무신.
이칭
근지(勤之)
시호
무양(武襄)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1570년(선조 3)
본관
의령(宜寧)
주요 관직
한성부판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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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조선전기에 전라도병마절도사 · 전라도순변사 · 한성부판윤 등을 역임한 무신.
개설

본관은 의령(宜寧). 자는 근지(勤之). 증조부는 남지(南智)이고, 조부는 공조정랑(工曹正郞)을 지낸 남구(南俅)이며, 아버지는 증병조판서 남계(南悈)이다. 어머니는 대사헌 이서장(李恕長)의 딸이다. 엄용공(嚴用恭)의 문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28년(중종 23) 식년 무과에 장원, 명종 초기에 함경도 병마절도사 · 동지중추부사를 지냈다. 1552년(명종 7) 왜구가 제주를 노략질할 때 제주목사 김충렬(金忠烈)을 대신하여 목사가 되어 이들을 무찔렀다.

1555년 왜구가 60여 척의 배로 대거 침입하여 장흥(長興) · 영암(靈巖) 등 여러 성을 함락시키는 을묘왜변을 일으키자 전라도좌방어사로 이준경(李浚慶)과 함께 남평(南平)에서 대파하고, 또 녹도(鹿島)를 쳐들어오는 왜구를 소탕하였다.

이러한 공으로 전라도병마절도사가 되어 영부(營府)를 다시 세우고 성을 보수하는 등 방어대책에 만전을 기하자, 이듬해 다시 침입해온 왜구를 격멸할 수 있었다. 1558년 왜구가 다시 침공해온다는 풍문이 있어 전라도순변사가 되어 해변 방위를 순열(巡閱)하는 데 만전을 기하였다.

1560년 한성부판윤으로 승진한 뒤 경기 · 황해 · 평안 삼도토포사(三道討捕使)가 되었고, 1562년 황해도 재령의 해서(海西)에서 일어난 임꺽정을 잡아 효수하였다. 뛰어난 무력에 지략과 충용이 있어, 여러 싸움에 혁혁한 공을 세웠다. 시호는 무양(武襄)이다.

참고문헌

『명종실록(明宗實錄)』
『선조실록(宣祖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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