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실의 불교신앙을 위하여 창건하였다. 조선의 태조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眞身舍利) 4매와 두골(頭骨)·패엽경(貝葉經)·가사(袈裟) 등을 흥천사(興天寺) 석탑에 안치하였는데, 1418년(세종즉위년) 세종이 내불당을 창건하고 이들을 옮겨 봉안하였다.
1419년에는 최흥효(崔興孝) 등에게 명하여 금자법화경(金字法華經)을 이곳에 옮기고 대비의 명복을 빌게 하였다. 단종 때 집현전과 사헌부의 학자들이 상소하여 내불당을 철폐할 것을 여러 차례 건의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세조 때에는 내불당을 크게 일으키고 법회를 열었다.
1456년(세조 2)에 법석(法席)을 열었고, 1459년 사월초파일에는 간경회(看經會)를 베풀었으며, 1464년에는 계양대군(桂陽大君)의 쾌유를 비는 특별법회를 열었다. 1470년(성종 1)에는 내불당을 철폐할 것을 주장하는 유생들의 강력한 건의가 있었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1483년에는 예조에 명하여 역대로 왕실의 보호를 받았던 이 절에 대하여 특별경계와 순시를 강화하도록 하였으며, 1507년(중종 2)에도 이 절의 보호를 명하였다.
내불당은 억불숭유정책으로 일관한 조선시대 불교의 특이한 단면을 살필 수 있는 사찰로서, 왕 자신의 믿음이 불교가 아닌 경우에는 선왕의 유지를 받든다는 명목으로 보호되어 조선 중기까지 유지되었다. 그러나 선조 이후에는 내불당이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