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포동 고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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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독무덤 · 덧널무덤 관련 생활유적. 시도기념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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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부산광역시 금정구에 있는 청동기시대 이후 집터와 독무덤 · 덧널무덤 관련 생활유적. 시도기념물.
개설

1996년 5월 25일에 부산광역시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은 19,693㎡이다. 높이 78m의 낮은 산에 15°정도의 완만한 북향의 야산 기슭에 위치한다. 이 지역은 원래 밤나무와 포도단지였고, 장기간에 걸친 과수원 조성 및 경작으로 인해 유적 파괴가 매우 심한 곳이었다. 1984년 부산시립박물관에 의해 1차조사가 이루어진 후 1985∼1986년에 걸쳐 부산시립박물관과 부산대학교박물관이 연합으로 2차 조사를 실시하였다.

유적은 해발 111.5m인 야산의 북서 경사면에 형성되어 있어 입지조건은 좋지 않으나 동북쪽에 형성된 두구동(杜邱洞)의 충적지를 바라보고 있으며 주위의 지형 중 비교적 경사가 완만하다. 이 유적의 주위에는 수영강(水營江)을 따라 선사시대에서 역사시대에 걸친 많은 유적이 분포한다. 동북쪽에는 청동기시대의 돌덧널무덤(石槨墓), 6세기대의 돌덧널무덤, 7∼8세기대의 토기가마(土器窯), 조선시대의 기와가마(瓦窯)가 조사된 두구동 유적이 있으며, 서북쪽의 작장 유적에서는 5∼7세기대의 분묘군 2개소가 있다. 또한 동남쪽의 두구동 신천마을에는 5∼6세기대와 고려시대의 돌덧널무덤이 있으며, 선동(仙洞) 하현마을에는 오륜대 고분군(五倫臺 古墳群)과 조선시대의 건물지가 있다.

내용

발굴조사를 통하여 청동기시대 수혈식(竪穴式) 장방형(長方形) 집자리 2기와 철기시대의 덧널무덤 42기, 독널무덤(甕棺墓) 6기 등 모두 50기의 유구가 조사되었다. 1호 집자리는 파손이 심하여 규모를 알 수 없었으며, 항아리모양토기(壺形土器)가 1점 출토되었다. 2호 집자리는 해발 70m 선상에 입지하는 장방형 움집자리로서 생토면을 약간 경사지게 ‘L’자형으로 파고 설치하여 남벽이 60㎝로 가장 깊고 동 · 서벽은 낮다. 집자리의 규모는 길이 5.4m이고 도랑(壁溝)이 설치되어 있는데, 도랑은 벽면 전체를 따라 ‘U’자형으로 설치되어 있다. 바닥은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으며 기둥구멍(柱孔)은 중앙에 2개, 서벽에 1개가 확인되었다. 화덕자리(爐址)는 발견되지 않았다. 유물은 골아가리(口脣刻目) 깊은바리(深鉢)와 바리(鉢), 항아리(壺), 장주형(長舟形) 반달돌칼(半月形石刀)의 미완성품이 출토되었다. 집자리 주변에서는 구멍무늬항아리토기(孔列文壺形土器)와 간돌화살촉(磨製石鏃)이 출토되었다.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에서 보이는 벽구는 영남지방 전기 청동기시대 집자리의 한 특징이다. 골아가리토기는 청동기시대 전기 유적의 표지적(標識的) 유물이며, 주로 구멍무늬토기와 공반되며 부산 반여동(盤如洞) 집자리와 비슷하다. 돌화살촉과 미완성 반달돌칼은 진양 대평리(大坪里) 집자리 출토유물과 비슷하므로 노포동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 후엽 정도이다.

독널무덤은 덧널무덤의 부장적 성격을 띤다. 이들 묘제는 그 길이에 의해 1.8∼2.6m, 2.7∼3.8m, 4.0m 이상의 소형, 중형, 대형으로 나누어지는데 길이:너비의 비가 1.5:1∼3:1의 사이에 있으며 1.5:1∼2:1에 집중되어 있다. 전체의 묘제로 볼 때는 차이점을 발견할 수 없으나 길이 4.0m 이상의 대형묘를 비교해 보면 크게 길이와 너비의 비율이 1.5:1∼2:1과 2:1∼3:1로 나누어진다.

출토된 토기류 중 둥근바닥항아리(圓底短頸壺)가 가장 많고 화로모양토기(爐形土器)가 각 분묘에서 다양하게 출토되었다. 뚜껑굽다리목긴항아리(有蓋臺附長頸壺)는 모두 7점이 출토되었는데 동최대경이 중간부분에 있고 목부분(頸部)의 외반도가 적다는 기형적 특징이 있다. 원저단경호는 가장 많은 수를 차지하며 타날문(打捺文)에는 격자문(格子文), 평행문(平行文)이 있으나 격자문이 많다. 유개대부장경호, 뚜껑굽다리입곧은항아리(有蓋臺附直口壺) 등과 공반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동최대경에 비해 높이가 점차 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항아리 중에는 도질소성품(陶質燒成品)도 보이고 있어 김해 예안리(禮安里) 74 · 160호분과 함께 도질토기의 발생시기를 밝힐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생각된다. 노형토기는 노포동 유적의 특징적인 유물인데 그 크기에 의해 대 · 중 · 소로 나누어진다. 대형 노형토기는 목과 몸체가 뚜렷이 구분되고 입지름(口徑)이 몸체지름 보다 작은 것과 입지름이 몸체지름과 같거나 크고 어깨(肩部)의 너비가 좁아져 목과 몸체의 경계가 뚜렷하지 않은 것으로 나누어진다. 중형의 노형토기는 대부분 다리(臺脚)에 구멍(透孔)이 없고 몸체가 매우 얕은 것이 특징이다. 어깨에는 대부분 사격자문(斜格子文)이 시문되어 있고, 목부분의 외면에는 등간격으로 종(縱)방향의 마연을 하였다. 소형의 노형토기도 출토되었는데 모두 마연기법과 깎기수법에 의해 정면(整面)된 것이 특징이다.

철기류는 쇠화살촉(鐵鏃), 쇠투겁창(鐵矛), 고리자루큰칼(環頭大刀) 등의 무기류와 쇠손칼(鐵刀子), 쇠도끼(鐵斧), 쇠낫(鐵鎌), 쇠끌(鐵鑿) 등의 농 · 공구류로 나누어진다. 철촉은 무경식(無莖式)과 유경식(有莖式)으로 나누어지며, 촉몸(鏃身)이 긴 무경식철촉의 경우 촉몸의 양측선이 평행을 이루는 것이 촉몸의 양측선이 약간 만곡(彎曲)하는 것 보다 선행하고 있다. 유경식철촉은 단면 ‘V’자형, 단면 ‘V’자형의 역자식(逆刺式), 유엽형(柳葉形), 유엽형역자식, 능형(菱形), 사각추형(四角錐形), 착두형(鑿頭形) 등 다양하다. 쇠투겁창은 길이 40㎝를 경계로 2분되는데 40㎝ 이하의 것은 유개대부장경호와 함께 출토되며 관부가 뚜렷하지만 대상(台床)을 띠는 것이 특징이다. 40㎝ 이상의 것은 다양하며 길이가 75㎝인 것도 있다. 관부가 강조되어 능형을 띠고 창몸(矛身)에 비해 투겁(部)의 길이가 짧아 실용성이 없는 것과 관부가 직각을 이루며 창몸과 투겁의 비가 약 1:1에 가까운 것으로 나눌 수 있다. 환두대도(環頭大刀)는 3점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유개대부직구호와 공반되었으며 고리부분이 말각방형(抹角方形)을 띠고 배관(背關)과 인관(刃關)이 뚜렷하지 않다. 쇠도끼는 비교적 많은 양이 출토되었는데 주조철부(鑄造鐵斧)와 단조(鍛造)철부로 나누어진다. 주조철부는 투겁의 단면이 사다리꼴이며 대부분 사용으로 인해 날이 마모되었다. 단조철부는 어깨(肩部)가 강조되어 길이에 비해 날이 넓은 것이 있는데 이는 어깨가 있는 주조철부를 모방한 것으로 보인다.

이 유적은 경주 조양동 유적, 김해 양동리 유적과 함께 한반도 남부지방 국가발생의 배경 및 당시의 사회생활 해명에 귀중한 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참고문헌

『한국고고학사전』(국립문화재연구소, 2002)
『부산노포동고분Ⅰ』(부산시립박물관, 1988)
『부산노포동유적』(부산대학교박물관, 1988)
『부산 노포동 유적(釜山 老圃洞 遺蹟)』 Ⅱ(윤병용, 부산시립박물관, 1988)
「부산노포동고분(釜山老圃洞古墳)」(윤병용, 『부산직할시립박물관조사보고서』2, 1986)
『부산 노포동 유적』 Ⅰ(윤병용, 부산시립박물관, 1985)
「철기시대(鐵器時代)의 묘제(墓制)」(김기웅, 『한국사론(韓國史論)』13 하(下), 국사편찬위원회, 19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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