농민조합운동 ()

근대사
사건
1926년부터 1935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농민조합 형태의 농민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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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정의
1926년부터 1935년 사이에 일어난 일련의 농민조합 형태의 농민운동.
개설

1920년대 초 소작인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소작인조합은 1920년대 후반에 들어서면서 전체 농민을 포괄하는 농민조합으로 체제를 개편하였다.

이는 농민운동의 성격이 단순한 소작조건의 개선이라는 경제투쟁으로부터 전체 농민의 권익 실현을 위한 일제에 대한 정치투쟁으로 전환되는 과정에서 이루어졌다.

즉, 자작빈농이나 자작중농도 결국 소작농으로 영락(零落)하는 현실 속에서, 소작농과 자작농이 전체 농민을 억압, 착취하는 일제와의 싸움에서 연대투쟁을 하게 된 것이다.

연원 및 변천

소작인조합의 농민조합으로의 개편은 1926년 1월전라남도의 무안농민연합회가 무안농민조합으로 개편되고, 이어 암태소작회가 암태농민조합으로 개편되면서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1926년에는 119개가 되고, 1928년에는 307개로 급증하였다. 그리고 이 농민조합조직의 전국적인 확대 · 발전은 조선농민총동맹의 지도에 의한 것이었다.

농민조합 형태의 농민운동은 1926년부터 1929년까지의 시기와 1930년부터 1935년까지의 시기로 나누어진다. 전자의 시기는 소작인조합에서 농민조합으로 개편되는 합법적 조직의 시기이다. 후자의 시기는 비합법적 운동의 시기로서 이른바 적색농민조합(赤色農民組合)으로의 개편 · 활동의 시기를 의미한다.

전기의 농민운동 가운데 대표적인 것으로는 1925년 이후 2년간 계속된 전라남도자은도 농민소작쟁의, 1927년의 전라북도 옥구의 후다바사 농장쟁의(二葉社農場爭議), 1927∼1931년의 평안북도 용천불이흥업회사 서선 농장쟁의 등을 들 수 있다.

이같은 대규모 소작쟁의들은 일본인 대지주와 조선인 대지주, 특히 제국주의적 대지주를 대상으로 한 것이 많았다. 그 양상도 장기화 · 폭동화하는 형태를 보였다.

이 시기 일제 식민지 지배권력은 지주의 배후에 있지 않고 전면에 나서서 농민들의 대지주 투쟁을 억압하였다. 이로써 농민들의 투쟁은 반제투쟁(反帝鬪爭)으로서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띠게 되었다.

한편, 일제는 1930년대에 들어서 1931년 만주사변으로 대륙진출을 시도하고, 1932년 「소작조정령」과 1934년 「조선농지령」을 발동해 농민운동에 대한 봉쇄 · 탄압을 강화하였다.

또, 일제는 1933년에 들어서서는 이른바 농촌진흥운동을 전개하면서 일체의 농민단체를 해체시켰다. 오직 일제의 관제농민조직만 강화함으로써 농민들의 조직적 운동은 거의 불가능하게 되어 농민운동은 불가피하게 비합법적 지하운동으로 방향을 전환하게 되었다.

여기에 1928년 이른바 ‘12월테제’ 이후 공산주의자들의 농민운동 지도 강화의 방침이 보태어져 적색농민조합운동이 시작되었던 것이다.

이리하여 1930∼1935년의 농민운동은 대중적 시위나 농장사무소 습격, 그리고 일제경찰서 습격 등의 격렬한 폭동의 형태로 나타나 항일투쟁의 성격이 보다 강화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는 1930년 함경남도 단천 농민폭동과 정평 농민시위, 1931년 함경남도 홍원 농민시위, 1932년 경상남도 양산 농민폭동 등을 들 수 있다.

일제는 이러한 적색농민조합에 대해 철저한 탄압을 가하였고, 그 탄압 하에서 농민조직도 철저히 지하조직화되었다. 이 시기 적색농민조합이 가장 많았던 곳은 함경남북도 · 경상남북도 · 전라남북도로서, 특히 함경남북도에 가장 많았다.

적색농민조합의 활동은 1936년 12월 「조선사상범보호관찰령」 실시와 1937년 7월 중일전쟁, 1938년 「국가총동원법조선시행령」 공포 등의 전시체제의 시작과 일제의 철저한 탄압으로 1937년 이후는 거의 불가능한 상태로 되었다.

1939년 「소작료통제령」 공포로 소작쟁의마저 일체 봉쇄되는 단계에 이르러, 1930년대 말에는 농민운동이 실질적으로 중지되는 상태에 이르렀다.

참고문헌

『일제하한국농민운동사(日帝下韓國農民運動史)』(조동걸, 한길사, 1978)
「일제하 민족해방운동의 과제와 농민운동」(박현채, 『한국민족주의론(韓國民族主義論)』 Ⅲ, 창작과 비평사, 1985)
『동아일보(東亞日報)』
『조선일보(朝鮮日報)』
『경성일보(京城日報)』
『日本帝國主義下の民族革命運動』(淺田喬二, 未來社, 19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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