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0년 보물로 지정되었다. 25엽으로 이루어진 화첩으로, 종이 바탕에 수묵과 옅은 채색으로 그렸으며 크기는 각각 세로 27㎝, 가로 22.7㎝이다.
이 화첩 그림들은 주변의 배경적 설명을 간단하게 처리하고 풍속 자체에 역점을 둔 인물 중심으로 구성되어 한층 박진감 넘친다. 특히 원형 구도 등을 이용한 짜임새 있는 구성으로 회화적 효과를 높이고 있다. 인물의 표현은 철선묘(鐵線描)와 정두서미묘(釘頭鼠尾描: 처음에 붓을 세게 내려 긋고 서서히 쥐꼬리와 같이 가늘게 선을 긋는 법)을 사용하였다. 이 묘법은 무명옷의 빳빳한 질감을 표현하는 데 적합한 표현 방식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짧고 꾸불거리도록 방향의 전환을 주어 화면에 활기와 생기를 불어넣는 데에 기여하였다. 이밖에도 둥글 넙적한 얼굴에 둥글한 눈매를 지닌 조선시대의 전형적인 소탈한 서민상을 표출한 점이라든가, 등장인물들의 사실적이고 해학에 넘치는 동작의 묘사 등 풍속화가로서 김홍도의 탁월한 기량을 실감하게 한다.
작품은 「기와이기」, 「주막」, 「빨래터」, 「자리 짜기」, 「벼타작」, 「점심」, 「대장간」, 「논갈이」, 「서당」, 「무동」, 「점괘」, 「고누놀이」, 「씨름」, 「서화감상」, 「길쌈」, 「담배 썰기」, 「편자 박기」, 「활쏘기」, 「우물가」, 「고기잡이」, 「장터길」, 「나루터」, 「신행」, 「노중상봉」, 「행상」으로, 현재는 낱장의 형태로 떨어져 있다. 또한 화첩의 앞뒤에 2점의 「군선도(群仙圖)」가 붙어 있었으나, 현재는 역시 분리되어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를 높이 평가하는 것은 그림 속 인물의 감정을 주변의 상황과 유기적으로 연결하여 자연스럽게 나타냈다는 점이다. 특히 「씨름」에서 가운데의 씨름꾼들을 보면 낭패의 빛이 뚜렷한 얼굴 표정과 넘어가지 않으려고 상대방의 옷을 움켜지고 있는 모습에서 누가 이기고 지는지를 분명하게 구분할 수 있다. 이들의 표정과 자세는 구경꾼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다. 화면 오른쪽 위에 있는 구경꾼들은 상체를 앞으로 굽히면서 승리를 독려하고 있다. 그리고 오른쪽 아래의 두 사람은 넘어가는 자신의 편이 안타까운지 입을 벌리고 놀라는 표정으로 몸을 뒤로 젖혔다. 하지만 화면의 맨 아래에 등을 보이고 있는 어린 아이는 이러한 열띤 상황에 아랑곳하지 않고 엿장수를 바라보는 모습이 재미있다.
이 화첩에는 풍자성이 돋보이는 장면들도 등장한다. 특히 「벼타작」의 경우 왼쪽 부분에는 일꾼들이 볏단을 메어치는 장면을 배치하고 오른쪽 부분에는 이를 감독하는 마름을 그려 넣었다. 일꾼들은 웃으면서 태질하는 자연스런 모습으로 표현한 반면, 갓을 비스듬히 쓴 마름은 비스듬히 누워 담뱃대를 문 채 거드름을 피우는 자세로 표현하였다. 마름과 일꾼의 대조적인 자세에서 신분간의 불공평한 관계에 대한 강한 풍자를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에로틱한 작품으로는 「빨래터」, 「우물가」, 「소등에 탄 촌부」 등이 있다.
풍부한 상황 설정, 절묘한 감정 표현, 신분 갈등과 같은 사회 풍자, 에로틱한 장면 등 단순한 풍속 표현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그 속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이야기를 재치있게 풀어낸 뛰어난 작품이다.
이 화첩의 앞뒤에는 붙어 있었던「군선도(群仙圖)」2점 중 하나는 속도감 있는 붓질로 옷자락이 앞으로 휘날리는 당(唐)오도자(吳道子)의 화풍으로 그렸다. 다른 하나는 동세를 억제하고 중묵(重墨)으로 마무리하여 차분한 분위기를 조성하였다.
궁중 화원이었던 김홍도는 정조의 총애와 후원을 받으면서 활발한 활동을 하였다. 이 시기에 정조는 규장각에 자비대령화원 직제를 설치하여 화원들에게 녹취재(祿取才)라는 시험을 실시하면서 관리하고 후원하며 재교육함으로써 화원의 운영 체제에 획기적 변화를 초래했고 도화 활동의 내용과 성격에 큰 영향을 미쳤다. 특히 녹취재 화제(畵題)로서 ‘속화(俗畵)’를 인물화로부터 따로 떼어내어 독립시킴으로써 속화, 즉 풍속화의 유행이 절정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대에 김홍도는 다양한 주제의 풍속화를 그려냈으며 『김홍도필풍속도화첩』은 그 결과물의 하나이다.
『김홍도필풍속도화첩첩』은 조선 후기 활기차고 건강한 서민들의 삶을 반영하였다는 점에서 중요할 뿐만 아니라 김홍도의 절제있으면서도 박진감 넘치는 선묘로 통일감 있는 화면을 구성하고 해학적이고 풍자적인 장면을 연출함으로써 풍속화의 회화성을 한 단계 높였다. 이같은 풍속화첩의 제작 전통은 이후 김득신, 신윤복 등의 후배 화가들뿐만 아니라 19세기 말, 20세기 초까지도 시정(市井)의 화가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