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 중대에 들어와 9주5소경(九州五小京)가 확립되면서 성립하는 군태수(郡太守)의 전신이다. 신라 중고시대는 지방통치제도가 그 자체 군사적인 색채를 강하게 지니고 있었던 만큼 군단조직과 지방통치조직을 확연하게 구분짓기란 어렵다.
당주는 지방관이면서 동시에 군단장으로서의 기능을 아울러 지니고 있었다. 당이란 원래 군대에서 사용하는 깃발이나 부대 자체를 뜻하며, 그러한 의미에서 당주는 군사적인 성격을 강하게 띤 지방관이라 하겠다.
이러한 성격의 당주에 관한 최초의 기록은 6세기 중엽에 건립된 단양신라적성비(丹陽新羅赤城碑)이다. 비문에는 추문촌당주(鄒文村幢主)와 물사벌성당주(勿思伐城幢主)라는 직명이 보인다.
이 기록에 의하면 당주가 마치 하나의 성(城)·촌(村)을 관할하는 지방관처럼 보이기도 하나, 이들은 몇 개의 성·촌을 하나의 단위로 하는 지역을 관할하는 군관구적 성격의 지방관이다.
561년에 건립된 창녕진흥왕순수비(昌寧眞興王巡狩碑)에는 주(州)의 장관인 군주(軍主)와 성·촌에 파견된 지방관인 도사(道使)가 당주와 나란히 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당주가 군주와 도사를 매개하는 중간적 성격의 지방관임을 의미한다.
말하자면, 당주는 지방민으로 편성된 독자적인 군단을 지휘하는 지방관이라 하겠다. 그런데 진평왕 때 이후 지방행정과 군단조직이 점차 분화되면서 당주의 군사적 기능은 중앙군단으로 이양되어 새로운 군단의 명칭을 사용한 당주가 만들어지고, 지방행정관으로서의 기능은 군태수로 이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