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는 독립된 소국(小國)의 지배자였으나 맹주국에 통합됨에 따라 부족장의 신분에 머무르게 되었다. 부여의 경우 마가(馬加)·우가(牛加)·저가(猪加)·구가(狗加) 등을 들 수 있다. 고구려의 경우 연맹왕국을 형성한 오부족(五部族)의 족장 후예들과 전왕족(前王族)이나 왕비족 집단의 우두머리가 해당된다.
부여나 고구려 사회는 연맹체적인 유대가 강했으므로, 부족장들은 정치적인 자치권을 어느 정도 유지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지배기반의 차이에 따라 수만명 이상의 주민을 지배하거나, 왕과 마찬가지로 사자(使者)·조의(皂衣)·선인(仙人) 등과 같은 관료조직을 갖추기도 하였다.
아울러 읍락(邑落)의 군사 지휘권도 독자적으로 장악하였다. 이러한 군사 지휘권은 읍락 내 병력 동원권과 연계되어 있던 것이며, 병력 동원권은 역역(力役) 동원권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이러한 권리가 대가들의 자치권을 구성하는 주요 부분이었다.
그 밖에 호민(豪民)을 통해 촌락의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재물을 우선적으로 장악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비단옷과 값비싼 털옷을 입었으며, 금·은으로 꾸민 책(幘: 모자)과 조두(俎豆: 고급 식기)를 사용할 수 있었다. 그리고 많은 인원을 순장(殉葬)할 수 있는 세력을 가지고 있었다. 이외에 대가는 재판권도 가지고 있었는데, 형률을 담당하는 관서가 없을 때에는 관습법에 따라 대가들이 재판을 처결하였으며, 수도에서는 여러 명의 대가들이 함께 재판에 관여하였다.
이렇듯 대가는 정치적 권력의 소유자일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부의 소유자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러한 정치적 권력이나 경제적인 부는 세습이 가능했다. 따라서 연맹왕국에서의 정치적 실권은 왕보다는 오히려 대가들에게 있다고 보여지기도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에서 볼 때 대가들은 그들이 지배하고 있는 읍락의 저항이나 이탈 등을 제어하는 데 있어 왕실의 지원을 기대할 수 있었고, 특히 외세의 침공에 따른 지배기반의 근본적인 파탄을 막는데 있어 국가의 역할은 절대적인 것이었다. 이 때문에 각 대가들은 왕실을 중심으로 결집하게 되었다.
이에 대가들은 자신들의 자치권을 일정부분 왕에게 통제받고 있었다. 대표적으로 무역권과 대외교섭권을 박탈당한 상태이며, 거느린 가신(家臣)의 명단을 왕에게 보고해야만 하였다. 이들 가신 역시 왕 직속의 같은 관리들과는 차등이 있었다. 이러한 점을 감안할 때 대가는 왕권질서 체계 내의 범위를 크게 벗어나지 못한 위치에 있었으며, 결국 중앙의 귀족적 정치세력으로 성장하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