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 분지의 신천 동안에는 동쪽과 북쪽의 금호강, 서쪽의 신천에 의해 형성된 범람원을 두고 남북으로 길게 낮은 구릉으로 형성된 침식저지대가 형성되어 있다. 이 구릉의 중앙부에 많은 돌덧널무덤(石槨墓)들이 분포하고 있는데 이것이 복현동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이 있는 곳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게 되어 1975년 2차에 걸쳐 문화재관리국(현, 국가유산청)과 경북대학교박물관에 의하여 발굴조사 되었다. 고분군은 Ⅰ구와 Ⅱ구로 나누어지는데 조사된 것은 모두 140여 기의 분묘이나 이 가운데 101기가 보고되어 있다.
복현동 고분군에 봉토가 남아 있는 분묘는 없었으나 원래는 봉토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봉토의 형태는 돌덧널이 2기 또는 3기가 나란하게 배치되거나 장축이 서로 엇갈리게 배치되는 것들이 많은 점으로 미루어 한 사람무덤(單葬墳)만 축조된 것이 아니고 두 사람무덤(兩葬墳)과 여러 사람무덤(多葬墳)도 축조된 것으로 판단된다. 그리고 두 사람무덤이나 여러 사람무덤의 경우 돌덧널 상호간의 거리가 비교적 가까운 점으로 미루어 선축된 봉토를 일부 제거하고 후축된 돌덧널을 설치하고 봉토를 이어나간 것들이었을 것으로 판단된다.
보고된 분묘는 모두 구덩식돌덧널(竪穴式石槨)이나 주변에서는 독널무덤(甕棺墓)도 조사된 적이 있어 독널무덤도 축조되었을 것이다. 돌덧널은 대부분 아래에 양 장벽은 수 매, 양 단벽은 1매의 판석을 연결하여 세우고 그 위에 판석이나 깬돌(割石)을 눕혀 쌓아 축조한 것인데, 아래에서부터 판석을 눕혀 쌓아서 축조한 경우도 몇 예가 있다. 돌뚜껑을 한 경우도 많은데, 이 경우 뚜껑으로는 판석을 이용하였다. 바닥에는 자갈이나 잘게 깬돌을 깔거나, 판석을 깔아 주검받침(屍床)을 마련한 것도 있으나 많은 것들이 생토면을 그대로 이용하였다. 돌덧널의 대부분은 외덧널식(單槨式)이나 주부곽식(主副槨式)도 발견된다. 주부곽식의 경우 모두 발치측에 판석을 세워 막은 것으로 하나의 덧널을 구분한 동곽구분식(同槨區分式)이다. 이외에 머리측에 칸막이를 하여 부장간을 마련한 것도 발견된다. 부장품의 배치형태는 머리측에만 부장한 것, 머리측과 발치측 양쪽에 부장한 것, 발치측에만 부장한 것 등 다양하나 비교적 커다란 분묘의 경우 대부분 머리측과 발치측 양쪽에 유물을 부장하고 있다. 그리고 발표된 분묘들 가운데는 꺾쇠가 전혀 출토되지 않았으나 비교적 대형인 것들(Ⅱ-1호, 1-75호 등)은 머리측 부장품(토기)이 돌덧널의 양 장벽과 단벽에서 일정한 간격을 두고 배치되었으나 발치측 부장품(토기)의 경우 양 장벽, 단벽과 밀착이 되게 배치된 것으로 보아 머리측의 토기를 포함하는 나무덧널(木槨)이 내부에 들어 있는 경우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대략 커다란 분묘의 경우 동곽구분(同槨區分)의 주부곽식이거나 돌덧널의 내부에 나무덧널을 설치한 것으로 볼 수 있고, 후자의 경우는 유물을 머리측의 것은 나무덧널의 내부에, 발치측의 것은 나무덧널의 외부에 부장한 것이 된다. 그러나 대부분의 작은 돌덧널무덤은 외덧널식이고 머리측 또는 발치측 한 쪽에만 유물을 부장하거나 머리측과 발치측 양쪽에 유물을 부장하나 나무덧널은 사용하지 않은 것이다. 돌덧널의 크기는 가장 큰 것(Ⅰ-54호)이 길이, 너비, 높이가 3.95×0.86×0.45m(주 · 부곽 합한 크기)로 대부분 소형이다.
출토유물은 빈약하여 큰 것의 경우도 토기가 20여 점에 불과하고, 장신구로는 금동제귀고리가 출토된 것들이 몇 기 있다. 마구류는 전혀 출토되지 않았고, 철기류로는 화살촉, 도끼, 손칼(刀子), 낫, 미늘쇠(有刺利器) 가운데 한 두 종류만 출토되었다. 이외에 가락바퀴(紡錘車), 그물추(漁網錘) 등이 출토된 분묘가 몇 기 있다. 출토된 유물들로 보아 고분의 축조연대는 5세기 전반부터 6세기 중 · 후엽 사이로 추정되고, 무덤에 묻힌 피장자들은 당시 대구지역의 최고지배집단이었던 달서 고분군 축조집단의 하위집단으로서 신천 동편의 영역을 주무대로 한 촌락집단 유력자들로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