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구사립사범학교 ()

단체
1906년 대구에 설립되었던 사립사범학교.
정의
1906년 대구에 설립되었던 사립사범학교.
설립 목적

경상북도 관찰사로 있던 신태휴는 당시 교육사업에 노력했던 대표적 관리로 그는 매 동에 10집을 1통으로 하고 매 10개 통에 1개 소의 사립학교를 설치하는 일에 힘쓴 결과 도내 41개 군에 설치된 사립학교가 370군데이고, 취학생 수가 4,500명이나 되었다.

신태휴는 관내의 부자들을 초청하여 청소년 교육의 중요성을 역설함으로써 이들로 하여금 각기 자원하여 자금을 학교에 희사하여 학교경비에 충당하도록 하였다. 그는 이들 사립학교에서 필요로 하는 교원을 양성하기 위하여 대구에 사범학교를 세우도록 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06년 1월에는 김광제, 서상돈 등이 경북도내 각 군의 유지 400여 명으로 대구광문회를 조직하고 대구광문사를 설립해 신교육 운동을 전개하면서 사립협성학교(교장 徐相夏)를 세웠다. 이해 3월 신태휴는 전 승지(承旨), 서우순과 정규옥, 서상규 등 대구의 유지 20여 명으로 대구사범학교 설립을 위한 발기인으로 삼아 500여 원을 모으고, 60여 명의 후원자를 얻어 남문 밖 관덕당(觀德堂)을 수리해 교사양성을 위한 대구사립사범학교(교장 徐相夏)를 설립하였다. 9월에는 대구 최초의 공립학교인 대구보통학교(교장 嚴星九)가 세워졌다.

대구사범학교의 설립과 운영에 대비하여 1906년 3월에 신태휴를 비롯하여 전·현직 군수, 전직 참봉, 감찰, 의관(議官), 선달(先達), 주사 등 대구의 유지 67명이 1,315원의 보조금을 대구사범학교에 희사하여 교원양성을 적극 지원하였다.

대구사립사범학교의 교장은 서상하(徐相夏)였고, 학감은 김용선이었다. 이들은 특히 사범교육 이외에 고아교육에도 특별한 관심을 갖고 있어서 당시 경성에 있던 고아학교를 방문하여 학생들을 격려하고 재정적 원조까지 제공하였다.

대구사립사범학교는 100여 명의 학생을 모집해 일본어를 비롯하여 작문·산술·지지·역사·물리화학 등의 교과목을 가르쳤다. 5개월 동안 사범교육을 실시하다가 1906년 9월에 폐교되었다.

참고문헌

『한국근대교원교육사』Ⅰ(김영우, 정민사, 1987)
『한국개화기의 교원양성연구』(김영우, 창학사, 1984)
『제국신문』(1906.3.29, 1906.6.2, 1906.10.30)
『대한매일신보』(1906.3.11, 1906.6.20, 1906.6.30)
『황성신문』(1906.3.29, 1906.6.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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