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전 인터체인지 남쪽에 있는 높이 280m 정도의 고봉산(古鳳山) 동남쪽 경사면에 분포되어 있다.
대전에서 옥천으로 통하는 도로를 따라 세천 고개에 이르기 직전, 길 왼쪽으로 동신중학교가 있고, 그 옆으로 2차선 포장도로가 추동으로 이어진다. 이 길은 동면지역이 물에 잠기면서 새로 개설한 것이다. 옛날에는 주산동을 거쳐 질티고개를 넘어 왕래하였는데 지금은 산길이 희미하게 자취를 남기고 있다. 주산동 고분군은 이 소로를 사이로 모두 13기가 있는데, 주산의 뒷산이 되는 고봉산 동남쪽 산기슭의 경사진 곳에 있다. 이들 고분은 길이 50m, 길이 25m의 범위 안에 12기가 군을 이루고 있다.
대부분 소형고분들로서 제2호분만 굴식돌방무덤〔橫穴式石室墳〕이고, 6기(제1·7·9·10·11·12호분)는 앞트기식돌방무덤〔橫口式石室墳〕, 나머지 6기는 구덩식돌덧널무덤〔竪穴式石槨墓〕으로 되어 있다.
고분들의 장축(長軸)은 대략 남북방향과 동서방향으로 구분된다. 제7호분과 제9호분만이 정확한 정남북방향이고, 나머지는 모두 정남북과 정동서로부터 약간씩 편각(偏角)을 이룬다.
규모는 가장 큰 것이 길이 280㎝, 너비 120㎝, 가장 작은 것이 길이 120㎝, 너비 60∼70㎝ 정도이고, 기타 고분들은 그 중간 크기에 해당된다. 바닥에는 대부분 할석(割石)을 부분적, 또는 전체적으로 깐 주검받침〔屍床〕또는 널받침〔棺墓〕을 설치하였다.
1호 고분은 앞트기식돌방무덤(횡구식석실분)으로 이미 도굴되어 개석은 없어졌고 석실 윗부분이 드러나 있다. 석실안은 길이가 280cm이고, 너비는 아래부분이 120cm인데 비하여 위는 80cm이다.
내부구조 중 특이한 점은 석실 바닥을 구획하여 길이 240cm, 너비 70cm의 범위안에 돌조각을 1겹으로 깔아 놓은 것이다. 그 까닭은 간단한 시상(屎床)으로 사용하기 위한 것으로 여겨지는데 다른 무덤도 이와 같았다. 구조상 또 하나의 특징은 동쪽 단벽의 폐쇄 방법이다. 즉 개석을 덮은 후 동쪽 단벽을 통하여 출입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2호 고분은 이 지역 13기 무덤 중 유일하게 발견된 굴식(횡혈식: 橫穴式) 계통의 석실 고분이다. 1호 고분에서 서쪽으로 7m 거리에 있는데 내부 규모는 길이 270cm, 너비 170cm의 크기이다. 석실의 평면이 정방형을 이루지는 못하고 있으나 이곳의 다른 수혈식 석실들이 장방형으로 된 것에 비하면 폭이 훨씬 넓다. 이미 도굴된 까닭에 천장 덮개식 2장이 아래로 내려 앉아 있었고 크기는 그 중 하나가 길이 140cm, 너비 75cm, 두께 35cm 정도였다. 이 고분군 중에서 잔존 상태가 가장 양호한 2호 무덤은 석실의 남쪽 벽을 둘로 나누어 그 동쪽 부분을 입구로 하였으며 매장이 끝난 뒤 밖에서 이 입구를 돌로 막았다. 석실 안은 왼쪽을 조금 높게 하여 시체를 올려놓도록 하였는데 도굴꾼들이 원형을 파괴시켰다. 그리고 그 아래 바닥에서 8개의 토기와 1개의 방추차(紡錘車)가 발견되었다.
주산리고분군의 유물은 유적들이 대부분 도굴로 인해 파괴, 교란된 상태여서 대부분이 상실되었다. 토기는 굽다리접시〔高杯〕·손잡이달린 접시〔把手付杯〕·가는 목항아리〔細頸壺〕·뚜껑접시〔蓋杯〕·굽달린 긴목항아리〔臺付長頸壺〕·뚜껑항아리〔有蓋壺〕·작은 단지〔小形壺〕 등 종류는 다양하나 그 수는 총 54개체분(個體分)에 불과하다. 그 밖에 철제 손칼〔刀子〕 1점과 가락바퀴〔紡錘車〕 1점이 출토되었을 뿐이다.
부장토기의 주류를 이루는 것은 뚜껑있는 소형 굽다리접시들이다. 이것들은 높이가 2㎝ 내외에 불과한 낮은 굽을 가진 것이 특색이다. 간단한 굽구멍〔透孔〕이 뚫린 것도 있으며 뚜껑 꼭지의 형태는 그릇의 밑굽처럼 생겼다.
또한 주목되는 토기는 가는 목항아리로서 다른 명칭으로는 병형토기(甁形土器)라 부를 만한 것이 있다. 최근 이러한 종류의 토기 분포상이 백제지역 내에서 점차 밝혀지고 있다.
이 곳의 굽다리접시들과 가는 목항아리들은 서울 가락동과 방이동고분들에서도 보여 백제 후기 토기로 간주되며, 긴 목항아리의 경우는 신라 후기 문화의 요소를 반영하고 있다. 이러한 점들을 통해 볼 때, 대덕주산리고분군 유적의 연대는 대략 6세기 후반에서 7세기 전반경으로 추정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