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권 4책. 목판본. 원간 연대는 발문의 연대인 1395년(태조 4)으로 추정되나 원간본은 전하지 않는다.
오늘날 전해오는 판본은 우리 나라에 있는 홍문관본·비변사본(備邊司本)·규장각본을 비롯, 일본에 건너가 있는 나이카쿠문고본(內閣文庫本)과 탁족암본 등이 있다.
『대명률』은 조선 전시대에 걸쳐 우리 나라 형법의 일반법(보통법)으로서 적용되었으며, 역사상 외국 법전의 전체적 계수의 최초의 예이다.
『대명률』은 이미 고려 말인 1373년에 도입되어 연구되고 적용의 필요성이 역설되었다.
조선 태조도 즉위하자마자 범죄를 처결함에 있어서 반드시 『대명률』을 적용할 것을 선언했고, 정도전(鄭道傳)도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의 헌전(憲典)에서 『대명률』의 적용을 밝혔다.
태조는 『대명률』을 반포하고자 했으나 법문의 용어가 생소하고 어려워서 이해하기 어려우므로 정승 조준(趙浚)에게 명해 직해하도록 하였다. 이에 조준이 고사경(高士褧)과 김지(金祗)에게 이두를 사용하여 알기 쉽게 직해하게 하였다.
두 사람은 직해를 한 뒤 정도전과 당성(唐誠)의 윤색을 받아 초고를 확정했으며, 1395년 2월 100여 본을 간행하였다. 당시에는 직해한 『대명률』을 따로 이름을 붙이지 않고 그대로 『대명률』이라고 불렀다. 후대에 『직해대명률』이라고도 부르다가 일제 강점기에 『대명률직해』라고 부르게 되어 오늘날에도 그대로 쓰이고 있다.
『대명률직해』는 『대명률』을 원문 그대로 직해한 것이 아니고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하였다. 때문에 우리 고유의 용어와 표현이 적지 않다. 예컨대, 관제·관서명·직명·친족 호칭을 조선의 명칭과 호칭으로 바꾸었다.
또한 속형(贖刑)의 동전(銅錢)을 오승포(五升布)로 환산해 납부할 수 있게 하고, 도류천사지(徒流遷徙地)에 관한 규정을 실정에 맞도록 바꾸었다. 이 때문에 직해된 『대명률』 그 자체가 법전으로서 적용될 수 있었다.
그러나 이 직해율도 매우 이해하기 어려웠으므로 1404년(태종 4) 11월 어려운 조문을 쉽게 번역할 것을 건의한 예가 있다. 1431년(세종 13) 6월에도 세종이 조서강(趙瑞康)과 권극화(權克和)에게 상정소(詳定所)에서 『대명률』을 역해(譯解)하게 한 일이 있는데, 실제로 역해되어 간행되었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대명률직해』는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직해한 조문이 적지 않으나, 명률은 본래 중국의 사정을 기초로 하여 만든 것이기 때문에, 중국과 사정이 다른 조선에 조문 그대로 적용하면 무리가 생길 수밖에 없었다. 또 명률에도 불비한 곳이 있으므로 명률 이외 조선의 국정에 적응하는 법제를 만들어야 하였다.
즉, 1398년 3월 속형이 부자에게는 면죄하고 빈자에게는 가혹하기 때문에 따로 도·류·속형법을 정해 정상을 참작, 행형하게 하였다. 1402년 9월 속죄환산율을 3분의 2로 감했으며, 1425년 3월 다시 3분의 1로 감하였다. 1430년 명률이 정한 유형의 3,000리·2,500리·2,000리 등을 조선의 실정에 맞도록 각 도를 기준으로 해서 유형지를 정하였다.
본래 『대명률』은 오왕(吳王) 원년율, 홍무 7년율, 홍무 9년율, 홍무 22년율, 홍무 30년율이 있는데, 직해에 이용된 『대명률』은 홍무 22년율로 추정되고 있다.
홍무 30년율은 460조 30권인데, 『대명률직해』는 456조 30권이며, 각 율의 조목의 순서도 조금씩 다르다. 홍무 30년율에 구체적으로 추가된 조목은 병률 궁위(宮衛)의 현대관방패면조(懸帶關防牌面條)와 형률 단옥(斷獄)의 이전대사초초(吏典代寫招草)이다.
『대명률』이 『대명률직해』의 내용으로 적용되어 통일적인 형정을 기할 수는 있었으나, 특수한 사건이 생긴 경우 사건 고유의 사정을 무시하고 획일적으로 『대명률』을 적용하거나 유추하여 적용하는 폐단이 생기곤 했다. 때문에 고유 형법의 발달을 저해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현재 전하는 책은 모두 목판본이다. 임진란 이전인 16세기 중엽의 중간본 2종과 17세기 이후의 중간본 두어 종이 있다.
현대의 복제본은 17세기의 한 중간본을 저본으로 하고 여러 이본을 대교해 활판으로 간행한 『교정대명률직해(校訂大明律直解)』(1936)와 16세기의 한 중간본을 영인한 『대명률직해』(1986)가 있다.
이들 이본 사이에는 부분적인 차이가 있으나, 이두에 관한 한 거의 동일함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조선 초기 이전의 이두를 연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있다.
이 책의 발문에는 그 용자(用字)가 보통의 한문과 달라 사람들이 쉽게 알 수 없으므로, 설총(薛聰)이 지은 이도(吏道)로써 축자적(逐字的)으로 직해한다는 내용이 있다. 여기의 이도는 곧 이두와 같은 말이다.
이두를 설총이 지었다는 설은 『제왕운기』에 처음 나오는 것인데, 이 때 이것이 정설(定說)이 되어 그 뒤에도 계속 이러한 기록이 나온다. 이두문으로의 번역은 대체로 원문의 내용을 축자적으로 직해한 것이지만, 실정에 맞지 않는 것은 수정 또는 보충하기도 하였다.
이두문에서 이두를 빼면 한자어의 나열이 된다. 한자어는 원문의 용어를 그대로 옮겨온 경우도 있지만, 대개는 당시 우리 나라에서 보편적으로 사용되고 있는 용어로 대체하였다. 그리하여 원문에서는 한 글자로 쓰인 것이 이두문에서는 두 자 이상의 한자 숙어로 된 것이 많다.
한자 숙어는 한어(漢語)에서 온 것도 있지만 우리 나라에서 만들어진 숙어도 있다. 어순은 국어와 한문의 어순이 섞였다. 이두는 국어의 조사와 어미가 주축을 이루고 명사·대명사·동사·부사들도 쓰였다. 명사는 실질 명사의 예는 드물고, ‘等·ᄃᆞᆯ, 事·일, 所·바, 樣·양, 分·분, 第·뎨’와 같은 형식 명사가 주로 쓰였다.
동사도 조동사가 자주 쓰이고 본동사는 특수한 용어로 제한되어 있다. 실질 명사와 본동사는 행정상의 서식(書式)에서 필요한 용어들로 되어 있는데, 이들을 제외하면 이 책에 쓰인 이두는 국어의 문법 관계를 나타내는 것으로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이 책은 훈민정음이 창제되기 불과 50년 전에 쓰인 것이지만, 어법은 15세기 국어와 큰 차이를 보여주고 있다. 일례로 15세기의 부정사(否定辭) ‘아니’에 해당하는 말은 ‘不冬·안ᄃᆞᆯ’과 ‘不喩·안디’로 나누어져 있어, ‘不冬’은 동사문(動詞文)의 부정에, ‘不喩’는 명사문(名詞文)의 부정에 쓰인 것이 그것이다.
이러한 구별은 고대 국어 문법이 보수적으로 유지되어온 것으로 추정되는데, 조선 말기의 이두까지 계속되고 있다. 이 밖에 당시의 국어도 반영하고 있다. ‘爲有·ᄒᆞ잇’은 15세기의 ‘ᄒᆞ야잇’ 또는 ‘ᄒᆞ앳’에 대응하는 것인데, ‘有’의 이러한 용법은 고려 초의 어법에서는 쓰이지 않은 것으로 고려 중기 이후에 발달한 것이다.
그 외에도 중세 국어와는 직접적으로 대응되지 않는 많은 예들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현상은 고려 이전 국어의 모습을 보수적으로 유지하고 있는 것이어서 이 책이 비록 14세기 말에 편찬되었다 하더라도 고대 국어 내지는 전기 중세 국어의 자료로 다루어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