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보단사연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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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단사연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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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04년 대보단 설치에 대한 경연의 논의를 수록한 정책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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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1704년 대보단 설치에 대한 경연의 논의를 수록한 정책서.
내용

1책. 필사본. 대보단은 임진왜란 때 원군(援軍)을 보내 도와준 명나라의 신종(神宗)과 마지막 왕인 의종(毅宗)의 은의(恩義)에 보답하기 위해 지은 단이다. 서문과 발문이 모두 없다. 규장각 도서에 있다.

이 책은 경연에서 1704년 1월 10일부터 1705년 2월 19일까지의 사이에 사목(事目)에 따라 논의한 것을 날짜순으로 기록하였다.

내용을 보면, 일찍이 민정중(閔鼎重)이 북경(北京)에 갔다가 의종의 친필인 ‘비례부동(非禮不動)’ 넉자를 얻어 가지고 와서 송시열(宋時烈)에게 주었다. 송시열은 이것을 화양동(華陽洞) 석벽에 새겨놓고 지방(紙榜)을 사용해 신종·의종 두 왕의 제사를 지냈으며, 그 뒤 권상하(權尙夏)가 유지를 받들어 부근의 유생들과 함께 사당을 세우고 제사하였다. 이어 국가적인 행사로 격상해야 한다는 여론이 일어나 조정에서는 이에 왕이 친림한 가운데 이 문제를 의논하였다.

1704년 3월 19일 의종의 60주년 기일(忌日)을 맞아 단을 만들고 단헌례(單獻禮)를 행하기로 했으며, 다시 삼헌례(三獻禮)로 변경하였다. 또한, 이후부터 숭정(崇禎)의 연호를 쓰기로 하고, 제기 등에 청나라의 연호는 새기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단의 규모는 우리나라 태묘(太廟)와의 관계를 고려해 사직단(社稷壇)에 준해 설치하고, 남교(南郊)의 예를 따르기로 하였다. 제일(祭日)은 매년 2월로 정하고, 제물과 제기는 명나라의 의식을 따르며, 옷과 희생물은 우리나라의 예를 따르기로 하였다.

의의와 평가

대보단 설치는 당시 청나라와의 외교관계를 간접적으로 시사해주며, 당시 지도층 인사들의 의식 경향을 암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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