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6년 1월호를 창간호로 발행하였다. 편집 겸 발행인은 이홍기(李弘基)이다. 창간호는 216면의 규모였는데, 안재홍(安在鴻)의 「내외정세와 건국전망」, 이극로(李克魯)의 「4천년의 역사가 있다」가 실려 있고, 신탁통치 반대 특집, 유봉영(劉鳳榮)의 「조선독립운동사」, 김광섭(金光燮)의 「40년간의 일본 죄악사」 등의 글이 실렸다.
제2호에는 김도태(金道泰)의 「기미운동(己未運動) 회고좌담회」와 백철(白鐵)의 「건국과 지식계급좌담회」, 특히 정열모(鄭烈模)의 「한자폐지에 대하여」라는 글에서 한글전용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1년 이상 정간하였다가 나온 1947년의 5월호는 부피가 64면으로 줄었고, 내용도 유봉영의 「조선독립과 미소공위(美蘇共委)」, 김동리(金東里)의 「순수문학과 제3세계관」과 같은 몇 편의 글밖에 실리지 못하였으며, 1948년 1월호는 다시 지면이 줄어 40면이었는데, 국제연합조선위원단 문제가 태반을 차지하였다.
같은 해 4월호는 불과 26면으로 다시 줄어들었으나, 「총선거와 자주정부수립」이라는 글을 통하여 의욕을 보였으며, 8월호는 140면으로 늘어났는데, 이승만(李承晩)의 「국권수립에 제(際)하야」라는 글과 이윤영(李允榮)·이범석(李範奭)의 글 및 ‘정부수립과 제반정책’이라는 특집이 있었다.
같은 해 송년호에는 조소앙(趙素昻)·설의식(薛義植) 등의 글로 엮어진 「현내각과 여론」이라는 특집과 송지영(宋志英) 등의 글로 엮어진 중국문제특집이 실려 있었다.
1949년 3·4월 합병호에는 김구(金九)의 「민족통일의 재구상」이라는 글과 이승만·김구·김규식(金奎植)·한설야(韓雪野)·박헌영(朴憲永)·김일성(金日成) 등에게 보내는 각계 저명인사들의 글로 엮은 ‘국민이 호소하는 서한(書翰)’이라는 특집을 내어 국민들의 호응을 받았다.
그러나 그 뒤 햇볕을 보지 못하고 1949년에 종간되었다. 이 잡지는 조국의 민주발전과 통일의 성취를 위하여 힘쓴 시사종합잡지로서 그 의의를 지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