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 초에 존재하였으나 후기에는 관제정비 과정에서 탈락된 듯 보이지 않는다. 대주부(大主簿)는 고구려 초기에 중국의 영향을 받아 설치된 ‘주부(主簿)’로부터 파생된 것이다. 주부는 본래 왕의 측근에서 왕명출납(王命出納) 등의 행정업무를 맡은 관료로서 국왕의 필요에 따라 족적 세력과는 비교적 무관하게 성립된 것이다.
『삼국지(三國志)』동이전(東夷傳)의 기록을 보면, 고구려 초기의 관계조직(官階組織)은 상가(相加)·대로(對盧)·패자(沛者)·고추가(古鄒加)·주부(主簿)·우태(優台)·승(丞)·사자(使者)·조의(皂衣)·선인(先人)으로 되어 있다. 그런데 이 중 상가·고추가·대로·우태 등은 족장적 성격과 유관한 것이어서 행정적 관료의 관계로 기능하는 데는 어느 정도 제약이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국가체제의 정비과정과 더불어 이렇게 미흡했던 관제는 보다 분화·정비되어야 했을 것이다.
『삼국지』동이전의 기록에 의하면, 당시 왕과 대가(大加)들은 각기 사자 이하의 관료들을 거느리고 있었는데, 그들은 비록 명칭은 같으나 지위상의 차별이 확실했음을 전해준다.
이는 보다 합리적인 관계조직의 체계화가 있었음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거니와, 왕권강화를 위해서나 논공행상을 위해서도 보다 분화된 관계조직이 요청되었다. 대주부는 바로 이러한 필요에서 주부로부터 분화된 것으로 보인다.
대주부에 관한 기사는『삼국사기』차대왕본기(次大王本紀) 2년(147)조에 나타난다. 차대왕이 즉위하기 전부터 그를 따르던 환나우태(桓那于台) 어지류(菸支留)를 좌보(左輔)로 삼고 작(爵)을 더하여 대주부로 삼았다고 한다.
이 때 좌보는 최고위 관직의 하나였음을 고려할 때, 대주부의 관계도 주부를 뛰어넘어 패자나 대로에 버금가는 것이었으리라 추측된다. 봉상왕(烽上王) 3년(294) 국상(國相)에 임명된 남부대사자(南部大使者) 창조리(倉助利)가 대주부로 승진되었던 것을 통해서도 대주부의 관계가 매우 높았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고구려 후기의 14관등 중에는 대주부가 보이지 않고 주부만 남아 있는데, 혹 그 주부 안에서 구분되는 관계로서 작용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오히려 ‘형(兄)’이나 ‘사자’ 등을 기간으로 다양하게 분화·정비된 후기의 관계조직 속에서 대주부의 필요성이 사라져 없어진 것으로 보인다.
주부 관등의 분화와 소멸은 왕권과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다. 주부가 왕권을 뒷받침하는 관이었기 때문에 왕권의 강화 과정에서 대주부가 파생되어 나타난 것이며, 결국 관등제에서 대주부와 주부를 중심으로 한 관등제의 재편이 일어난 것도 왕권의 강화를 반영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제의 발전 과정에서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관료조직에 대한 필요성의 증대와 주부 관등이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때문에 6∼7세기 귀족연립정권(貴族聯立政權)이 성립되자 상대적으로 왕권이 약화되고 이로 인해 왕권과 연결된 대주부 역시 소멸된 것으로 보인다.